‘골목마다 악기 소리 흐르게 할 터’

박병재 영창악기 부회장

지난 2006년 2월 하순. 박병재(66)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소요산 밑의 시골 주택 앞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잔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다가오는 봄엔 어떤 채소를 심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에서 35년간 몸담으면서 대표이사 사장과 부회장까지 역임한 그는 평소 은퇴 후엔 전원생활을 하리라 마음먹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경기도 동두천에 널찍한 터를 산 뒤 시골집을 직접 지었고 연못과 정원도 꾸몄다. 상추 배추 고추 호박을 길러 먹을 수 있는 채마밭도 만들었다. 새봄에는 친지와 친구들을 초청해 갓 뽑아낸 상추에 된장을 발라 두부찌개와 함께 맛볼 꿈에 젖어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박 부회장님, 급히 좀 서울로 오셔야겠습니다.” 전화의 골자는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향했다. 정 회장은 앞으로 영창악기를 인수할 생각인데 그럴 경우 경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흔쾌히 수락했다. 현대에 몸담는 동안 정 회장과는 각별한 관계였고 더욱이 악기 업체는 단순한 제조업체가 아닌, 평소에 그리던 문화 산업 아니던가.그는 중고등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교회 성가대원(베이스)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에 살 땐 근처 광림교회의 장로로 있으면서 음악위원장 및 성가대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해 왔다. 음악위원장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성가 파트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 오케스트라까지 총괄하는 교회음악의 최고책임자였다.이런 인연으로 그는 영창악기 최고경영자를 맡기로 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계 최대 악기 업체인 야마하를 분석하는 일이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미쓰비시상사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자신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야마하 본사와 공장을 가보고 싶으니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했다.어찌 보면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었다. 야마하의 경쟁사 대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야마하 관계자들은 기분좋게 승낙했다. 그해 4월 하마마쓰공장을 방문해 피아노 현악기 관악기 등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야마하 대표이사 및 주요 임원진과 면담도 했다. 야마하 관계자들은 “우리 함께 음악의 저변을 넓혀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2006년 5월 영창악기 부회장을 맡았다. 그는 우선 크게 5가지 일을 추진했다. 첫째, 생산 설비 재정비였다. 영창악기는 1956년에 창업한 국내 굴지의 악기 업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경영난을 겪으면서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이런 현상이 10년 이상 지속됐다. 피아노를 연간 10만 대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 판매 대수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생산 제품과 생산량에 적합한 구조로 생산 라인을 재배치했다. 특히 정리 정돈이 생산성 향상과 시간 절약에 큰 도움이 된다며 공장 내부의 어수선한 설비와 도구 작업 동선을 반듯하게 정리했다.둘째, 영창악기가 현대산업개발의 투자로 클린 컴퍼니로 탈바꿈했으니 이제부터 기업 정상화에 적극 나설 것을 임직원에게 주문하는 한편 자신감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품질 향상이 중요하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악기를 생산하자고 독려했다.셋째, 판매는 내수 위주에서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그동안 영창악기는 내수 시장에선 강점이 있었으나 수출은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해외 판매망을 30여개국에서 75개국으로 대폭 확대했다. 최근 들어 판매망을 새로 개설한 지역은 프랑스 독일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 유럽과 칠레 등 중남미가 포함돼 있다. 연내에 이를 100개국으로 늘릴 계획이다. 특히 떠오르는 시장인 중국에서 피아노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넷째, 문화 경영이다. 그는 피아노를 비롯해 클라리넷 플루트 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를 생산하는 영창악기가 “단순히 악기를 파는 업체가 아니라 문화를 전파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임직원에게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문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유치원생들을 초청해 인천공장을 견학시키고 있고 ‘2014년 아시안게임’ 유치 기념으로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판타스틱 피아노페스티벌’을 열기도 했다. 555명의 피아노 연주자가 동시에 참가한 이 행사는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지난 5월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 맞은편에 뮤직센터를 개설해 악기 강습 및 악기 전시를 하고 있다. 그는 “삼성동 요지에 돈을 벌 수 있는 판매장을 내지 않고 음악 교육 공간을 마련한 것도 문화 경영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다섯째, 신시사이저 사업의 강화다. 피아노가 전통음악의 기본 악기라면 신시사이저는 전자음악의 기본 악기다. 이 악기 하나로 트럼펫 호른 바이올린 드럼 등 수백 가지 악기 소리를 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연주 효과도 낼 수 있다.특히 영창악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신시사이저 음원 칩을 연구·개발하는 미국 보스턴 소재 KURZWEIL(커즈와일)을 인수해 이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그는 영창악기의 전자악기 사업 브랜드인 ‘KURZWEIL’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보스턴에는 음악 소프트웨어 관련 전문가 20여 명이 연구·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현대음악의 본거지가 미국이고 이들의 취향에 맞는 음원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현지인들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영창악기는 경기도 분당에 본사를, 인천과 중국 톈진에 공장을 두고 있다. 직원은 국내 약 200명, 톈진에 1300명, 미주 판매법인 및 미주전자연구소에 60명을 두고 있다. 작년 매출은 중국 공장을 포함해 약 1100억 원에 달했고 올해 목표는 1500억 원으로 잡고 있다.그의 목표는 “세계적인 종합 악기 업체로 도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판매에서 벗어나 저변 확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수요를 창출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악기를 다루는 인구와 동호회가 너무 적다”며 “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하다 보니 음악에 대해 배려할 여유가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이런 문화가 확산돼 골목마다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퍼져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영창악기가 앞장설 것”이라고 덧붙인다.현대자동화 신화 창조의 주역 중 한 명인 박 부회장이 자동차 회사의 글로벌 전략과 제품 및 마케팅 전략을 어떻게 영창악기에 접목해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하모니를 이뤄낼지 관심을 모은다. 〈 회사 개요〉창업: 1956년 본사: 경기도 분당 공장: 인천 및 중국 톈진주요 생산품: 피아노 신시사이저 현악기 관악기매출: 작년 약 1100억 원(올 목표 1500억 원) 해외 판매망: 75개국 약력:1941년생. 64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68년 현대자동차 입사. 87년 현대자동차 캐나다법인 사장. 96년 현대자동차 사장. 99년 현대 및 기아자동차 부회장. 2004년 현대정보기술 회장. 2006년 영창악기 부회장(현). 수상:대통령표창. 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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