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라든 지갑…살림살이 ‘한숨’

흔들리는 물가·내수경기

결혼 8년차 주부 강선영(35) 씨는 아파트 인근의 할인 매장에 가면 고민이 많다. 이것저것 사야 할 물건은 많지만 얇아진 지갑을 감안하면 선뜻 손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에 이것저것 따져보고 그중 싼 것만 카트에 담는다.강 씨는 “최근 물가가 올라도 너무 많이 올랐어요. 아이들 교육비는 줄일 수 없으니까 외식비나 의류비 등 다른 쪽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민간 소비는 전분기보다 0.6% 증가하는 데 그쳐 3년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 물가는 급등하자 서민들이 먹고 입는 것을 줄인 데 따른 것이다.남성복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김민호(50) 사장도 최근 주름살이 하나는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경기에 민감한 패션 업종이라 올 들어 매출이 20%나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직원을 줄일 수도 없고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이다 보니 김 사장이나 직원들 모두 속병을 앓을 수밖에 없다. 김 사장은 “당장 경기가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데리고 있는 직원들 잘 대우해 주지도 못해 미안할 따름”이라고 푸념했다.올해 우리 경제는 내수 부진에 따른 체감 경기 악화로 서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지난 4월 28일 기획재정부는 “경기가 정점을 통과해 하강 국면에 진입했다”고 인정했다. 보통 정부가 ‘경제 심리의 위축’을 우려해 민간에 비해 보수적으로 경기를 진단하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전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그동안 정부는 경기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의 강도를 점점 높여 왔다. 지난 4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내수가 너무 위축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사실상 경기 진작 대책을 지시했다. 강만수 기회재정부 장관은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2분기부터 성장률이 더 떨어질 것이다. 당초 얘기했던 6% 성장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성장률 저하를 우려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25일 4·9 총선에서 낙천, 낙선한 한나라당 의원 40여 명을 초청한 만찬 자리에서 “지금처럼 여러 가지 경제 여건이 안팎으로 어려우면 심지어 1% 성장하면 다행이란 얘기도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4월 3일 발표한 ‘경제동향 보고서(그린북)’에서 “최근 한국 경제는 수출 호조에 힘입어 그간의 상승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고 평가한 점을 감안하면 정부의 경제에 대한 인식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급반전한 것이다. 정부가 이처럼 위기감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제로 모든 경기 지표가 급격하게 ‘아래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분기에 비해 0.7% 오르는 데 그쳤다. 3년 3개월 만의 최저치다.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내수가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4% 중반대의 증가세를 이어오던 민간 소비는 1분기 3.5% 증가에 머물렀다. 올 1분기 설비 투자 증가율은 전기 대비 0.1%로 정체 상태였다.국제 유가의 사상 최고치 행진이 이어지면서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1%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28만 명이었던 취업자 증가는 올해 3월 18만 명 수준까지 뒷걸음질했다.경제를 떠받치는 ‘양 날개’ 가운데 하나인 내수 엔진이 꺼져가는 상황에서 또 다른 날개인 수출마저 선진국 경기 등 대외 여건에 따라 신장률이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이런 가운데 대표적 국책 연구 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12일 발표한 올해 경제 전망 보고서를 통해 실질구매력 증가율이 떨어지는 반면 물가는 크게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KDI는 올해 우리 경제 성장률은 4.8%로 지난해(5.0%)보다 소폭 하락하는 데 그치겠지만 내수가 크게 위축돼 체감 경기가 훨씬 좋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민간 소비는 지난해 4.5%에서 3.0%로, 설비 투자는 6.2%에서 2.4%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실질 구매력을 나타내는 국내총소득(GNI) 증가율은 지난해(3.9%)의 절반에 가까운 2% 안팎에 그칠 것으로 예상돼 성장률에 비해 체감 경기는 형편없을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 수출 상품의 가격 상승보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원유 옥수수 밀 등 수입 가격 상품이 더 크게 올라 교역 조건이 나빠졌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소비자물가는 당초 예상했던 2.5%보다 4.1%로 높아져 체감 경기가 더 악화될 것으로 예측됐다. 경제성장률을 놓고 보면 소득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서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아우성인 게 이 때문이다.KDI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추경 편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정부와 대조적으로 경기 부양보다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두면서 감세를 추진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놨다.앞서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8일 기준금리를 연 5.0%로 9개월째 동결한 뒤 “지금 당장은 물가 안정이 거시경제 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KDI는 아울러 해외로부터의 충격이 환율 변동에 의해 흡수되도록 함으로써 국내 거시경제의 안정을 위한 독립적 통화 정책의 여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해 내외 금리차를 감안해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정부와 시각차를 보였다.최근 미국과 유사한 금융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영국은 금리를 부분적으로 인하하고 있지만 유럽연합(EU)은 금리를 동결하고 있으며 호주는 금리 인상 추세를 유지하면서 거시경제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최근의 우리나라 경제 상황에 대해 일부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의 물가 상승) 우려를 제기한다.KDI 국제정책대학원 유종일 교수는 “인플레이션은 확실한 상태이고 스태그네이션(장기간의 저조한 경제 성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라면서 “그동안 우리의 성장률 수치가 높았다는 차원에서 보면 4%대 초반의 성장률은 스태그네이션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전략본부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 오일쇼크 때처럼 물가가 10% 이상 급등하고 성장률은 0%로 떨어져야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현재 상황이 스태그플레이션 선상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스태그플레이션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이와 함께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수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라며 “중소기업이나 서민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반면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현재 상황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판단하기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며 “아직까지는 수출이 견조한 상승세를 이어가는 등 실물경기가 부진하다는 확연한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경기 부진이 진행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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