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
국제 유가의 고공행진과 함께 소맥(밀) 옥수수 등 국제 곡물 가격의 앙등, 각종 자원의 고갈과 이에 따른 확보 경쟁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특히 곡물 가격과 철 구리 금 등 주요 금속류의 가격 상승은 인플레이션 압력 증가로 이어져 국가 경제 운용과 기업 경영, 일반 가계에까지 직접적인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특히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가량을 차지하는 미국 경제의 침체 영향까지 겹쳐 예상보다 큰 폭의 경기 둔화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5%에서 4.8%로 낮추면서 정부의 목표치 6%와 거리를 더욱 벌려 놓았다.인플레이션 압력은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지난 2005년부터 세계 각국 연구 기관들은 원자재 가격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에 주목했다. 하지만 이때는 중국 등 신흥 국가들이 세계 경제에 편입되면서 생산성 향상, 주요 국가 통화 정책 효율성 개선 등으로 부정적 영향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위기 경보가 본격적으로 울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들어서부터다. 수급 불균형에 달러 약세가 더해져 원자재 가격이 일제히 급등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하반기부터는 아예 ‘사상 최고치 경신’이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할 정도로 뜀박질을 이어가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원자재 관련 지표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원자재 가격 지수인 로이터-제프리 CRB(Commodity Research Bureau·1957년부터 발표해 온 가장 오래된 상품지수로 에너지, 곡물, 산업용 금속 등 19개의 실물자산의 종목별 가중치를 적용해 산출)지수의 경우 4월 11일 현재 407.45로 2006년 말 307.26에서 32.6%나 상승한 상태다.가장 가파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곡물 가격이다. 세계 곡물 가격은 10여 년 전인 지난 1996년 이후 급락해 장기간 낮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2006년 하반기부터 반등했다. 지난 한 해 동안 대두와 소맥의 가격이 연초 대비 70~80%나 오르는 초강세를 보였을 정도다. 산은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소맥은 2005년 이후 최근 3년간 3.3배, 옥수수와 대두는 2.5배 폭등한 것으로 나타났다.올해 들어서도 곡물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우며 상승 행진중이다. 특히 소맥은 지난해 10월 부셸당 9.5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 4월 4일 현재 9.7달러를 기록 중이다. 2006년 말에 비해 94%나 올랐다.철강 또한 만만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영국의 철강 분석 기관인 CRU의 철강가격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말 전 세계 철강재 가격지수는 2006년 말 150.18에서 올 4월 4일 현재 239.31로 59%가 상승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이 같은 기간 92%나 급등해 최고 증가세를 기록했고 북미 지역도 주택 경기 침체에 불구하고 42%의 상승률을 보였다.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상승 원인에 대해선 수많은 의견이 있다. 공통적으로 꼽히는 것은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개도국의 식량 수요 증가 △곡물을 이용한 바이오 연료 생산 확대 △지구 온난화에 의한 작황 부진 △식량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자원 민족주의의 등장 △미 달러화 약세에 따른 달러 표시 가격 인상 및 자금 유입 증가 등이다. 한마디로 ‘수요는 늘어나는데 생산은 부진하고, 그나마 원자재 생산국들이 원자재를 끌어안고 풀지 않으니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여기에 헤지 펀드 등이 달러 표시 자산의 운용 수익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원자재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한 게 가격 상승세를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이는 펀드시장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이머징 포트폴리오 펀드 리서치(ERFR)에 따르면 올 들어 세계 원자재 펀드에 유입된 자금은 36억 달러 이상이다. 국내에서도 원자재 관련 펀드 수익률이 초강세를 보이면서 유입 금액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은 거의 모든 기업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국 제조업체 500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업계 애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62%가 ‘올 들어 원자재 가격의 상승 여파로 기업 경영에 피해가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다. ‘피해가 다소 있다’는 응답도 36.8%에 달해 전체 응답자의 98.8%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채산성이 악화됐다’는 응답이 57.9%로 가장 많았고 ‘원료가격 상승에 따른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대답도 26.9%를 기록했다.생산 단가를 맞추지 못해 경영 수지가 악화일로를 겪는 기업들도 수두룩하다. 지난 4월 중소기업중앙회 설문에 따르면 원자재 값은 2005년 이후 35% 이상 올랐지만 납품 단가는 9.2%밖에 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단가 현실화를 요구하며 납품을 거부하는 단체 행동에 들어가는 업종도 늘고 있다. 올 초 레미콘 업계와 주물 업계의 납품 단가 현실화 요구에 이어 최근에는 삼성전자 휴대전화 협력업체들까지 집단 납품 거부에 나섰다. 중소기업의 납품 중단 사태가 유리·주물·포장재 등을 넘어 휴대전화 산업으로까지 번진 셈이다.서민 생활에도 영향이 지대하다. 밀가루 가격 상승에 따라 과자 자장면 라면 등의 제품 가격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높이는 형국이다. 밀가루는 지난해에 비해 68.6%(2월 기준), 과자는 18.5%, 자장면은 11.8%, 라면은 8.5%가 올랐다.문제는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냐다. 이에 대해선 전망이 다양하다. 신흥시장 수요가 계속 발생하면서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일시적인 급락 가능성에 대한 예상도 나와 있다.이민식 산은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장기적으로 개도국의 성장세에 따른 수요 확대로 원자재의 구조적인 수급 불균형이 지속될 것으로 보여 높은 가격을 유지할 전망”이라고 밝히고 “특히 단기간에 곡물 생산량 확대가 어렵고 세계 철광석 업계의 통합화에 따른 협상력 강화 등으로 공급 불안이 우려된다”고 밝혔다.이에 비해 이지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의 가격 급등 주범이 투기적 요인인 점을 고려하면 거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급락 가능성을 내놓았다. 그는 ‘원자재 가격의 급등 원인과 전망’ 보고서에서 “최대 수요처인 중국 경제를 비롯해 세계 경기가 급격히 후퇴할 경우 투기적 수요가 급감하면서 일시적인 가격 급락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밝혔다.국제 원자재값 상승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져 국가 전체의 불안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은 국가 차원의 자원 확보 정책을 한목소리로 요구하는 모습이다. 지난 5월 7일 LG경제연구원이 연 ‘글로벌 자원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세미나에서 오문석 경제연구실장은 “세계 자원 위기의 심화에 따라 자원 보유 여부와 대응에 따라 각국의 명암이 결정될 것”이라면서 “자원 부족 장기화에 대비한 국가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