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공헌은 선택 아닌 ‘필수’…인식 급변

대지진이 중국 기업에 남긴 교훈

“중국은 쓰촨성 대지진으로 물질적 손해를 봤지만 거대한 사회적 자본을 얻었다.”메릴린치증권은 중국의 지진 사태가 남긴 득과 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기부와 같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이 물질적 손실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중국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5월 12일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최근까지 걷힌 기부금만 무려 440억 위안(6조6000억 원)에 이른다. 중국 홍십자회(적십자회)는 중국 역사상 이같이 많은 기부금이 단기간 내 걷힌 적은 처음이라고 밝혔다.중국에서 일반 시민들은 기부와 자선이란 개념을 그저 먼 남의 얘기로만 느껴왔다. 그러나 대지진 이후 이 같은 인식에 큰 변화가 일었다. 네댓 살짜리 꼬마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돼지 저금통을 뜯어 코 묻은 돈을 모금함에 넣는가 하면 젊은이, 중장년층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금 모금에 동참하는 등 이번 지진을 계기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자선의 개념이 재발견됐다. 중국 언론들은 거지들까지 기부하는 사진을 올리며 자선의 의미를 부각시켰다.거대한 자선의 물결은 중국 기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중국 부호연구소인 후룬연구소의 루퍼트 후거워프 대표는 “쓰촨성 지진이 중국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에 분수령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진 사태를 계기로 CSR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설명이다.CSR가 생소하기만 했던 국유 기업이 이 같은 변신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중국 최대 송배전 회사인 SGCC(국가전망)가 대표적이다. 2006년 포천은 SGCC에 사회적책임 100점 만점에 0점을 부여했다. 조사 대상인 세계 64개 대기업 중 꼴찌를 했다. SGCC는 하지만 이번 지진 사태에 중국 국유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8600만 위안(129억 원)의 현금을 내놓으며 기업 이미지를 크게 높였다. SGCC는 1억3000만 위안(195억원) 규모의 구호 물자와 장비도 제공했다.현장으로 달려간 국유 기업 임직원들도 적지 않다. 중국 2위 유선통신 사업자인 차이나넷콤의 장춘장 최고경영자(CEO)가 지진 발생 나흘째인 5월 15일 통신복구팀을 끌고 지진 피해 지역인 원촨현의 잉슈 마을로 들어간 게 대표적이다. 차이나모바일 청두지사에 근무하는 류젠추는 원촨현에서 광케이블을 복구하다 여진에 따른 산사태로 사망하는 참변을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국유 기업이 CSR에 적극 나서는 것은 빈부 격차가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임직원들에게 높은 급여를 주는 국유 기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주요인이라는 지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중국사무소의 장선웨이 연구원은 “국유 기업 CSR의 가장 큰 목적은 대중과의 긴장 완화”라며 “최근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해외에서의 기업 이미지 제고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도 배경”이라고 설명했다.중국의 민영 기업들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CSR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지진 피해 지역에 2000만 위안(30억 원)의 성금과 함께 200명의 기술자와 통신장비를 보낸 중국 최대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는 지난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와 2005년 미국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재해를 입은 지역에도 기부해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외국 기업들도 중국의 CSR 바람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6월 초 쓰촨성 진당현 공단에 마련된 이재민 임시 거주지에 ‘LG 사랑의 빨래방(LG愛心洗衣房)’이 문을 열었다. 중국 언론은 LG가 직원들까지 배치해 24시간 무료 세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원촨현 등지에서 온 이재민 400여 명이 도움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언론에 나온 LG 빨래방 사진은 5년 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태 때 LG전자의 ‘아이러브차이나’ 캠페인을 떠올리게 했다. 일부 글로벌 기업 주재원들이 속속 철수하던 당시 LG전자는 ‘중국인들과 함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사스 최전선에 있는 의료인들에게 전자레인지와 세탁기 등 살균 제품을 기증하고, 중국 언론에 공익 광고를 게재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LG의 행보는 CSR를 현지화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 현대차 SK 포스코 등 대부분의 한국 대기업들은 이번 지진 피해 복구 지원에 적극 동참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5월 방중 때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쓰촨성 지진 피해 현장을 찾아 이재민들을 위로했다.닝푸쿠이 주한 중국대사는 최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의 지진 현장 방문에 대해 “중국 인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이를 가슴 속에 반드시 새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홍콩 총영사를 지낸 조환복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은 “이 대통령의 행보는 한국이 중국에 10억 달러 이상 투자해 국가 브랜드를 광고한 것과 맞먹는다”고 평가했다.하지만 중국에서 CSR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국유 기업 대부분이 기부에만 초점을 맞출 뿐 품질 관리 및 법 준수와 같은 사회적 책임에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기부금을 사적인 용도로 전용하는 부패도 걸림돌이다. 중국 공상은행의 한 지점은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모금된 성금을 유용해 나이키 신발 56켤레를 구입해 직원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급기야 중국의 감사원 격인 심계서(審計署)는 최근 지진 구호 성금에 대한 총액 조사를 비롯해 국내외 성금의 기부자와 수납자, 장부가와 실제 모아진 금액을 대조하고 사용 내역에 대한 지도 감독을 강화하는 등 대규모 감사에 나섰다. 재난 사상 최대 규모였던 성금 액수에 걸맞게 심계서의 감사팀도 전문 감사 인력만 1만 명이 동원된다. 감사팀은 18개 중앙정부 산하 기구와 성급 및 시급 각각 240개, 370개 기관, 2500개 현급 기구가 취급한 성금 및 물자 이동 상황에 대해 성역 없는 추적 감사를 실시할 방침이다. 심계서는 최근 전화와 우편, 인터넷을 통해 지진 성금과 관련한 비리 신고를 접수하고 나섰다. 전화와 우편을 통해 들어오는 신고는 하루 각각 70건, 40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성숙하지 못한 사회 여론도 CSR가 뿌리내리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 최대 부동산 상장 기업인 완커의 왕스 회장은 기부가 기업에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며 종업원의 1인당 기부금 한도를 10위안(1500원)으로 정했다가 네티즌들의 비판이 거세지자 결국 사과하고 1억 위안(150억 원)을 냈다.경제관찰보 등 중국 언론들이 기부금 서열을 매겨 공개하는 것이나 중국에서 돈을 많이 벌고도 기부에 인색한 외국 기업이라며 코카콜라 맥도날드 노키아 등 사명까지 거론한 전단지를 만들어 물품 구매 거부 운동을 촉구하는 전단지를 돌리는 현실도 CSR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천더밍 중국 상무부 부장(장관)은 “외국 기업들이 기부에 인색하다는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하고 “성금은 자발적인 것으로 개인 또는 기업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지진 이후 CSR가 중국의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CSR는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뿐 아니라 반외자 정서가 강해지는 중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한 생존 조건이 돼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중국에서 드라마로 바람을 일으킨 한류(韓流)가 CSR 물결도 선도하길 기대해 본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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