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를 사랑한 ‘소설가 오유권’

내가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것은 늦은 나이에 가족과 함께 유학길에 올라 몇 개월 안 되는 때였다. 황급히 돌아와 아버지가 영면하는 모습을 뵌 것은 발인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지금도 선하지만 누워 계신 아버지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그 평화는 마치 아버지가 칠십 평생을 바친 창작 활동에서처럼 고비가 많은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안식을 찾은 데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순수문학만을 고집하셨던 만큼이나 때 묻지 않아 힘든 삶을 사셨던 분이다.우리 문학사에 있어 아버지는 화석과도 같은 작품들을 남기신 것 같다. 어릴 적 아버지가 쓰신 작품이 늘 1950~60년대 남도의 농민을 소재로 하는 것을 보고 왜 더 큰 담론이나 사상을 담은 작품을 쓰지 않으시는지 내심 아쉬워하곤 했다. 부족하지만 한 독자로서 아버지의 작품을 회고한다면 아버지는 농민의 삶을 언어로 묘사해낸 사실주의 작가이셨던 것 같다. 밀레의 그림 ‘만종’이 당시 프랑스 농부의 삶을 그린 것이듯이 아버지의 소설은 남도 농민의 삶을 그린 것이다.아버지는 1925년 전라남도 영산포에서 태어나셨다. 지금은 영산강댐으로 배가 오가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영산포는 어선이나 화물선이 제법 많은 포구였다. 15대가 살아오던 강진을 떠나 나주로 이주하신 조부님 밑에서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환으로 일하다가 부산 통신학교에 입교하셨다. 달리 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지만 군에 입대한 시절을 전후해 김동리 선생의 지도로 소망하던 문학 공부를 시작하셨다. 6·25전쟁 때에는 해병으로 전함 통신병으로 근무하면서 5번이나 국어사전을 베껴 쓸 정도로 문학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다.아버지는 황순원 선생의 추천으로 1955년 ‘현대문학’에 등단한 이후 줄곧 남도 농민에 대한 소설만을 쓰셨다. ‘여기수’, ‘황토의 아침’과 같은 장편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품이 단편이었다. 어린 나에게도 자주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권하셨는데 아마도 아버지는 인생의 단면을 묘사함으로써 삶의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우리 현대 문학사상 가장 많은 단편을, 그것도 농민문학으로 쏟아냈던 만큼이나 아버지는 남도의 생활을 사랑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1968년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오겠다는 결심을 하신 것은 자식들 교육 때문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문단에서의 교유 범위가 넓어지고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하셨지만 그런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아마도 상경은 이후 아버지 삶의 고난의 전조가 아니었나 싶다.일면 외골수였던 아버지가 어린 두 아들과 혼자 사시게 된 것은 내가 중학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신림동 셋방에서 연탄불에 밥을 지어 싸주시던 도시락에 올라 있던 계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결혼한 누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옮긴 흑석동 그리고 도림동, 마침내 내가 대학 들어가던 해 봄 아버지는 쓰러지셨다. 아버지에게 서울은 순수문학에만 전념하면서 생활을 하기에 무척 힘든 곳이었다.아버지와 고향이 그리울 때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영산포 생가를 찾곤 한다. 골머실 아늑했던 마을에 초가집은 사라지고 없지만 어릴 적 보던 터 위에 옛집들이 대부분 그대로 서 있다. 허름한 채로 남아 있는 생가에는 호롱불 밝혀가며 문학을 공부하고 창작에 열중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서려있다.지난겨울 가족들과 내려갔을 때 바로 옆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길이 생겨 마치 벼랑에 걸쳐 있는 것 같은 생가를 보며 가슴이 찡해 옴을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난 천재성과 불굴의 노력으로 농민문학의 한 획을 그으신 아버지의 자취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한편 우리 순수문학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아버지는 호된 매를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박한 고료에도 자식이 해달라는 것은 한반도 거절하지 않은 정이 많은 분이었다. 형제, 자식 밖에 모르던 순수한 남도인이었으며 그들의 생활과 정신을 그대로 아름다운 언어로 새겨 남기고 간 예술가였다.작은 몸집에 비대하고 술, 담배를 좋아하였으며 주흥이 오르면 노랫가락을 아끼지 않던 낭만가였다. 아버지, 사랑과 서글픔, 그리고 긍지까지 모두 남기고 가신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1962년 농촌소설가 오유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29회)에 합격해 국세청과 재정경제부에서 근무했다. 법무법인 율촌 조세법무팀장을 거쳐 한양대 법학과 교수로 있다.오윤·한양대 법학과 교수 ohyoon@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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