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주의 ‘번쩍’…외국 기업 ‘벌벌’

확산일로의 반외자 정서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떨고 있다. 베이징올림픽과 티베트 사태가 만들어낸 애국주의적 반외자 정서 때문이다.노동절 휴일인 지난 5월 1일 중국 후난성의 창사, 푸젠성의 푸저우, 랴오닝성의 선양에 있는 까르푸 매장 밖에서는 수백 명의 중국인들이 모여 불매 촉구 시위를 벌였다고 중국 언론들이 전했다. 베이징에 있는 9개 전 할인점에서는 점원들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올림픽 로고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애국심에 호소한 마케팅을 벌였지만 평소에 비해 손님은 크게 줄었다.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지원한다는 의혹으로 중국 네티즌들이 이날부터 까르푸를 상대로 본격적인 불매 운동을 벌이기로 한 까닭이다. 이날 중국의 최대 검색 사이트인 바이두에서 까르푸의 중국명인 ‘자러푸(家樂福)’를 치면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문구만 떴다. 인터넷을 통해 불매 운동이 과도하게 확산되는 것을 막겠다는 중국 정부의 검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르푸는 매년 이맘때면 해오던 대대적인 판촉 행사를 취소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최근 특사를 보내 달래기도 했지만 반품은 계속 늘고 보이콧 움직임은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에 앞서 저장성 정부는 관할 까르푸 전 매장에 대해 식품 기한 준수 여부 조사에 들어갔다. 까르푸가 중국에서 거세지고 있는 무차별적인 애국주의 정서의 첫 희생물이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외국계 할인점 업체로 꼽히는 까르푸로선 중국 진출 10여 년 만에 최대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까르푸가 중국에서 운영하는 할인점은 122개로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출이 중국 유통 업계 전체에서 6위를 기록할 만큼 잘나갔다.하지만 문제는 비이성적 애국주의의 칼날이 까르푸만을 겨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인터넷에선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여전히 뜨겁다. 중국 정부가 웹사이트를 통제, 불매 운동이나 집회 등의 내용이 삭제되고 있지만 불특정 다수에 대한 e메일 보내기는 계속되고 있다.프랑스의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 역시 달라이 라마를 지원했다는 설이 돌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최근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중국인 신혼부부가 낸 돈을 점원이 위조지폐로 오인, 알몸 수색을 당했던 사건도 다시 부각되며 라파예트에 가지 말라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돌고 있다. 코카콜라는 티베트 승려를 모델로 쓴 광고로 인해 불매 운동의 타깃이 됐다. ‘꿈은 이뤄진다(make it real)’는 광고 문구가 티베트 독립을 지원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은 것. KFC는 티베트 사태와 직접 연관은 없지만 작년에 임금 착취로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이 다시 거론된다. 네티즌들은 중국의 어린이날인 6월 1일 몸에 좋지도 않은 음식을 파는 외국 회사에 가지 말자는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중국 정부와 CNN 간 설전은 이런 반외자 정서를 더 부추기고 있다. 지난 4월 9일 CNN 시사 프로그램의 앵커인 잭 캐퍼티가 중국인을 ‘폭력배’이며 ‘흉악범’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 중국 정부가 연일 사과를 요구하자 CNN 측이 유감 성명을 냈지만 중국 외교부는 이를 거부했다. 정식으로 사과하라는 주장이다. 대학생인 천광샤오 씨는 “서방 언론들은 중국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려 하지 않는다”며 “중국인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존중해 주지 않는데 대해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다.이 같은 분위기는 애국자와 매국노로 편을 가르는 ‘차이나 매카시즘’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티베트 망명정부 깃발을 들고 1인 시위를 예고했던 홍콩대 철학과 찬하우만은 오성홍기를 든 중국 유학생들 10여 명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다. 인터넷에선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성화 봉송 때 이를 탈취하려는 사람으로부터 성화를 지켜내 영웅으로 대접받던 징징은 까르푸의 불매 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표명한 뒤 하루아침에 매국노로 전락했다.이 같은 무차별적인 애국주의 정서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뿌리가 깊고 넓기 때문이다. 중국의 애국주의 정서는 5000년 역사에 대한 중국인들의 쯔다(自大) 심리와 1894년 아편전쟁 이후 거세진 외세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결합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애국주의를 통치 수단으로 부추기면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사실 중국 공산당 자체가 마르크스와 같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애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 근대에서 애국주의로 인한 반외세 물결은 1919년 5·4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갖고 있던 이권을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하자 중국 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톈안광장에 수천 명이 모여 시작한 반일 시위는 곧 중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군벌 정부는 1000명이 넘는 학생을 체포했지만 결국 노동자·상인까지 가세한 시위에 굴복해 파리강화회의 조인을 거부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일부 학생 리더들이 바로 2년 뒤인 1921년 중국 공산당을 창설한 것. 공산당은 1949년 집권 이후 분열을 막는 결집 수단으로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해 왔다.1999년 5월 유고 베오그라드를 공습하던 나토 공군기가 중국대사관을 잘못 폭격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을 때도 애국주의 시위가 분출됐다. 이튿날 베이징 미국대사관 앞에 모인 1만 명이 돌과 콘크리트 조각을 던져 대사관 유리창과 승용차를 부쉈다. 청두 광저우 상하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이어졌다. 미국 백악관 웹사이트는 중국 해커들의 공격으로 일시 다운되기도 했다.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중국에 두 차례 사과하고 3000만 달러 넘게 배상해야 했다. 2005년엔 일본 후소샤교과서의 역사 왜곡이 다시 불거지면서 그해 4월 반일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선전에서 3000여 명이 일본 백화점에 몰려가 “일본 제품을 사지 말자”고 외쳤다. 며칠 뒤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인터넷 e메일 휴대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은 군중이 모였다. 붉은 셔츠에 붉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는 거리를 누비며 반일 구호를 소리쳤다.특히 지난해 11.9%의 성장률을 기록할 만큼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는데다 유인 우주선 발사와 올림픽 개최 등으로 중국의 애국주의 정서는 한껏 고무된 상태다. 중국 지도부는 올림픽 개최로 100년의 꿈이 실현됐다며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입에 달고 다니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마당에 프랑스에서 올림픽 성화가 3번이나 꺼지는 수난을 겪고 서방의 언론들이 티베트 사태에 대해 반중국적인 모습을 보이자 애국주의 정서가 다시 한 번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후 주석은 “티베트 사태는 인권 문제가 아닌 중국 분열의 문제”라고 못을 박았다. 더욱이 인터넷의 빠른 보급은 이 같은 애국주의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그러나 지금의 애국주의 물결은 청조 말기 무차별적인 반외세 운동을 벌이다 오히려 청조의 몰락을 재촉한 의화단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의화단이 집권 세력인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의 지원을 받으며 반합법화한 것처럼 지금의 애국주의 물결에서도 중국 정부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중국 전문가들은 애국주의 물결이 양날의 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중국 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정당성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중국 진출 기업은 지금 애국주의 리스크에 대처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