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협’ 일본 ‘FTA’ …우선순위 달라

동상이몽 한·일FTA

“두 나라 기업 간 협력 촉진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도 경제연대협정(EPA: FTA의 일본식 표현) 협상 재개가 필요하다.”(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 “(FTA 협상 재개도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한·일 경제 협력이 더 중요하다.”(이명박 대통령)지난 4월 21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선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를 놓고 두 정상이 미묘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일단 두 정상은 금년 6월부터 FTA를 위한 실무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2월 후쿠다 총리 방한 때 FTA 교섭 재개를 검토하기로 합의한데 이어 실무 협상 시기를 6월로 못 박은 점은 진전이다.그러나 실무 협상 시기에 합의하기까지는 양측의 보이지 않는 샅바싸움이 치열했다. 일본 정부는 FTA 협상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한 반면 한국은 부품·소재 분야에 대한 투자 확대를 통한 무역 역조 개선 등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한국이 미국 유럽 중국 등과 빠른 속도로 FTA를 체결하고 있는데 대해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서둘러 한국을 FTA로 묶어 둘 필요가 강했다. 하지만 한국으로선 일본과의 FTA를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FTA에 몸이 단 일본에 대해 부품·소재 분야에 대한 투자를 한국으로 끌어 들여 무역 적자 축소의 계기로 삼는다는 전략인 셈이다.◇FTA에 대한 인식 차= 한국과 일본은 2003년 12월 이후 6차례 FTA 공식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일본이 농수산물 시장 개방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2004년 협상이 중단된 상태다. 두 나라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일단 실무 협상을 6월부터 시작하기로 합의해 협상 재개의 기회는 마련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FTA에 대한 양국 간 인식 차는 결코 작지 않다.한·일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후쿠다 총리는 FTA 필요성을 3번이나 거론했다. 반면 이 대통령은 ‘실질적 경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FTA 관련 질문엔 즉답을 피했다. 한·일 FTA에 관한 한 일본이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이다. 배경엔 일본의 말 못할 사정이 숨어 있다.일본은 농업 문제에 걸려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거대 시장과는 FTA 협상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지난해 미국과 FTA 협상을 타결하고 EU와도 협상을 시작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자 일본에선 한·일 FTA 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국과의 FTA에 적극 나서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FTA 후진국’을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선 민감한 농산물 등을 제외하고 공산품 등만의 관세를 낮추는 FTA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그러나 한국 입장은 좀 다르다. 농산물 등을 제외한 상태에서 공산품의 관세만 낮추는 ‘낮은 수준’의 FTA가 체결되면 한국은 손해다. 일본의 부품·소재에 대한 관세가 낮아지면 그렇지 않아도 사상 최대인 대일 무역 적자만 늘어날 수 있다. 일본이 협상을 서두르며 선별적이고 낮은 수준의 FTA에 적극적인 반면 한국은 늦더라도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FTA에 관심을 갖는 배경이다.한국이 ‘선(先) 경제 협력, 후(後) FTA’를 바라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이 ‘선 FTA, 후 경제 협력’을 우선하고 있다는 이유도 여기 있다.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이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의 경제에 격차가 있는 부분이 있다. 이를 방치한 채 협정을 맺을 경우 격차가 더욱 확대된다. 협상에 앞서 양국 기업 간의 상호 협력이 전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부문의 한·일 협력 필요성을 강조한 얘기다.후쿠다 총리는 “EPA가 진전되면 한·일 양국 기업 간에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며 EPA의 중요성을 내세웠다. 정상회담에 앞서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본 게이단렌이 주최한 ‘한·일 비즈니스 서밋 원탁회의’에서도 일본 측 참석자들 사이에선 EPA 교섭 재개를 원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측은 EPA보다는 기술 이전 등 중소기업 간 협력에 관심을 보였다.조석래 전경련 회장도 “한국 내에선 심각한 대일 역조에 대한 우려가 많다”며 “이런 상황에선 정부 간 FTA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국민적 동의를 얻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경제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 한국은 작년 대일 무역 적자가 사상 최대인 298억 달러로 5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불어났다.주요 원인은 한국의 산업이 중소기업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필요한 부품과 소재 등을 수입해 가공 조립해 수출하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외 수출이 늘면 늘수록 대일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때문에 한국은 FTA 체결로 공산품의 관세가 철폐될 경우 한국 내 허약한 부품·소재 산업이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등 완제품의 수입도 확대될 것을 걱정한다.◇日 농산물 등 걸림돌도 많아= 한·일 FTA 협상이 다시 시작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FTA로 인한 이해득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농산물 분야가 대표적이다. 2004년 협상이 중단됐던 것도 사실 농산물 개방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90% 이상의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반면 일본은 56%만 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협상이 깨졌다.사실 일본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지 않으면 한·일 FTA가 체결되더라도 한국 입장에서는 별로 얻을 게 없다. 세계 최강의 ‘제조업국’ 일본과 무관세로 맞붙을 경우 제조업에선 무역 적자 확대가 불가피하다. 한·일 FTA로 양국 간 관세·비관세 장벽이 철폐될 경우 대일 무역 적자는 추가로 61억 달러로 불어날 것이라는 게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추정이다.한국 정부가 그동안 “일본이 농산물 시장의 90% 이상을 개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FTA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그러나 지금까지 ‘농수산족(族) 의원’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계는 농수산물 시장 개방에 강하게 반대해 왔다. 지난해 한·미 FTA 협상 타결 직후에도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FTA 협상 재개를 고민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농수산족’은 일본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토권을 갖고 있다”며 “이들이 농수산물 시장의 개방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일본 정계의 반발을 뚫고 한·일 FTA가 체결되더라도 다 끝난 건 아니다. 당장 한국으로선 전자부품 분야에서 타격이 불가피하다. 첨단 전자부품 분야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일본에 비해 ‘절대 열위’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일본의 기술력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의 리튬이온 전지 기술은 78, 바이오센서는 71, 첨단 무선인식(RFID)은 68에 불과하다. 한·일 FTA가 발효될 경우 관세 장벽 덕에 그나마 버티고 있던 국내 중소 전자 부품 업체들은 상당히 큰 피해를 볼 수 있다.자동차의 경우 완성차, 부품 업계 모두 피해를 볼 수 있다. 도요타자동차 닛산 혼다 등의 일본 자동차들이 무관세로 들어올 경우 현대·기아차, GM대우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인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 부품 업계도 구조 조정에 직면할 수 있다.이런 점을 감안하면 일본 정부가 자국 내 반발이 큰 농산물 시장 개방 대신 자동차 관세 철폐 유예 등의 깜짝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도 있다.제조업 분야에서는 대일 수입품에 대한 무관세 비중이 2003년 28.3%에서 37.7%로 높아졌다. 일본의 대한 수입품에 대한 무관세 비율도 같은 기간 57.3%에서 77.1%로 높아져 FTA 협상 여건이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정인교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FTA에 따른 두 나라의 ‘이익 균형’이 이뤄져야 협상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