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추는 ‘거울’

아버지만한 거울이 또 있을까.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서 예전 아버지를 본다. 외모는 물론이고 걸음걸이, 말투, 습관, 성격 등 닮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까지 따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문득문득 놀랄 때가 많다. 나에겐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다. 다섯 살이 채 되기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역할을 아버지와 누나들이 대신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어머니가 없는 가정이 대부분 그렇듯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원망도 했지만 가난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충분히 베풀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이 든다.가난 속에서 아버지가 지켰던 원칙은 ‘가족애’와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이유든 가족 간의 다툼은 용서받지 못했다. 자애로운 아버지셨지만 자녀들 간의 사소한 말다툼에는 매를 드실 정도로 엄하셨다. 아마도 어머니가 없는 완전하지(?) 못한 가족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아니셨나 싶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자식을 온전히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말이다. 자녀들을 위해 목장지기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강원도 산골 벌목 현장에서 몇 개월씩 산속 생활도 감내하셨다. 몇 개월 만에 산속 생활을 마치시고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신 채 과자를 챙겨 귀가하시며 누나와 내 이름을 차례로 부르시던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소중함과 아버지라는 역할의 무게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해 말없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사랑을 선물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었다.8년 전 어느 비 내리던 밤. 폐암 말기의 몸으로 앰뷸런스에 오르시며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실 때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시려는 마음에 두려운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쓸쓸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아내와 나에게 유언으로 남기셨던 행복하게 살라는 너무도 평범한 말씀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아버지로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은 당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의 무게만큼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지 모른다. 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어렵게 마련한 조그만 빌라에서 맑은 볕이 드는 첫 아침을 맞이하며 아내와 작은 감동을 느낄 때도, 토끼처럼 예쁜 딸과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지금도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던 가족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또 하나의 유산은 비굴하게 살지 않는 ‘자존심’이었다.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지식과 자존심으로 항상 당당하셨던 아버지. 나 역시 그런 아버지를 닮아 유난히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한 소년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머니가 없는 가난한 결손 가정의 자녀로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한낱 자격지심에 가까운 자존심이었지만 그 자존심이 오늘의 나를 성장시킨 배경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대부분의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듯 나는 동갑내기들보다 빨리 철이 들었다. 학비를 절약하기 위해 인문계 대신 경북 구미의 금오공고라는 기숙학교를 택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이어진 5년간의 직업 군인 생활을 마치고 늦깎이 대학생으로 남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돌아 간신히 또래들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기까지 현실에 안주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특유의 자존심이 나의 길을 인도하곤 했다.먼 길을 돌아 나를 비추는 거울 앞에 선 지금 때로는 원망스럽고, 때로는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억만금의 재산보다 소중한 유산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들꽃이 지천으로 피는 봄날이면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들꽃의 이름을 묻고 외우며 염소와 젖소 다루는 법을 배우길 좋아했던 작은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행복한 상상을 하곤 한다. 수십 년 후 나의 모습을 자신의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나의 아이를 상상하며 늘 좋은 아버지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1969년 경기도 평택 출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PR석사. 아산재단 서울아산병원과 홍보대행사 KPR를 거쳐 헬스케어 전문 홍보대행사 엔자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김동석·엔자임 대표 dskim@enzai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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