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도 조언자 역할 충실히 할 것’

국제통화기금(IMF)은 스스로를 구조조정하고 있습니다. 개혁의 시기를 맞고 있는 거죠. 변화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회원국의 요구 자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전처럼 IMF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아요.서울 남대문의 한국은행 별관 6층으로 찾아간 IMF한국사무소는 생각보다 협소했다. 메랄 카라술루 소장과 한국인 직원 2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IMF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정도다. 카라술루 소장은 과천 정부청사 기획재정부에 마련된 또 다른 사무소를 오가며 업무를 본다. 사무실 크기는 물론 근무 인원까지 1998년 처음 문을 열 때 그대로다. 카라술루 소장은 오는 9월 한국사무소를 폐쇄하게 된데 대해 “한국에서 사귄 좋은 친구들과 헤어지게 돼 섭섭한 감정”이라며 “하지만 한 시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것이라 반갑기도 하다”고 말했다. 카라술루 소장은 지난 10년간 한국사무소의 활동과 최근 IMF가 추진 중인 자체 구조 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1시간가량 솔직한 의견을 들려줬다.사무소를 두 군데 운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중앙은행이 IMF에서 대표를 맡고 있어 해당 국가 중앙은행에 현지 사무소를 두는 게 보통이지요. 하지만 한국은 기획재정부가 대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부대표를 맡고 있어요. 그런데 정부 측이 저에게 독립적 관찰자로서 한국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방한한 외국 투자은행이나 투자자들을 만나 달라고 요청할 때가 있지요. 이럴 때 과천 기획재정부는 거리상 멀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한국은행이 추가로 사무실을 쓸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푼 거죠.한국사무소의 활동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바로 2001년 IMF 프로그램의 종료입니다. 그전에는 한국이 설정한 프로그램의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지, 벤치마크 지표를 모두 통과하고 있는지 매우 철저하게 모니터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요. 이런 작업은 굉장한 집중을 요구합니다. 그러난 2001년 이후 한국사무소가 맡게 된 역할은 모니터링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의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고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IMF는 185개 회원국의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 정부가 원하는 수준의 정보와 선진 사례들을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지요.한국사무소의 마지막 소장으로서 상반된 감정을 함께 느낍니다. 한국에 와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당국자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왔어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 떠나게 돼 아쉬워요. 반면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면 한 시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반가움도 있어요. 한국사무소를 폐쇄한다고 해도 한국과의 관계가 종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IMF 본부에는 아직도 한국을 담당하는 많은 인원이 계속해서 일하고 있지요. 한국 땅에서 한국 분들과 매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IMF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갈 겁니다.10년은 길다면 매우 긴 시간입니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개혁이 실행됐어요. 특히 금융과 기업 부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이뤘어요. 금융사들은 구조 조정을 통해 부실 채권 비율이 낮아졌고, 기업도 수익성이 증대됐지요. 기업 지배 구조에서도 많은 개선이 이뤄져 투명성이 강화됐어요. 지난 10년의 성과가 단지 IMF의 역할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지는 않아요.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이 갖고 있는 주체의식(ownership)이 이런 고도의 개혁을 가능하게 한 거죠. 한국은 기존에 해 왔던 비즈니스 방식을 통째로 바꾸는 매우 난이도 높은 개혁을 해냈어요.1997년 금융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당시로 돌아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빠르게 위축되고 있었지만 이는 문제의 한 측면에 불과해요. 그 이면에는 한국 금융 부문과 기업이 갖고 있던 구조적인 취약성이 자리해 있어요. 한국 기업과 한국 은행에 더 이상 대출을 해 주려고 하는 곳이 한 곳도 없었지요. 모두 한국에서 돈을 빼내려고만 했어요. 환율 시스템이 고정환율제에 가깝게 관리되면서 너도나도 리스크에 대한 헤지 없이 외화 대출을 쓰려고 달려들어 외환시장의 취약성도 커진 상태였어요. 약간의 부정적인 외부 충격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IMF는 이런 시스템적인 문제 때문에 긴축적 통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본이 한국에서 대거 유출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만 했어요. 금리나 환율을 그대로 유지할 방법은 없었지요.고금리 정책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면서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요. 물론 IMF가 했던 모든 결정이 다 완벽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한국은 회복했나, 한국이 치른 대가는 뭔가, 최종적인 결과는 좋은가 등을 기준을 높고 평가해야 합니다. 금융 위기를 겪은 아시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국은 분명히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했어요. 상당히 깊이 있는 구조 개혁도 달성했어요. 그 결과 한국의 경쟁력이 크게 제고됐고 보다 개방적인 금융 시스템과 외부 충격에 탄력성이 높은 경제를 갖게 됐어요. 이런 결과들은 당시의 정책이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IMF는 스스로를 구조 조정하고 있습니다(웃음). 개혁의 시기를 맞고 있는 거죠. 변화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회원국의 요구 자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전처럼 IMF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아요. 이제는 경제 분석이나 경제 감시, 금융과 실물경제 사이의 연계 같은 업무를 강화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IMF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개혁도 진행되고 있어요. 새로운 수익 모델도 만들어 가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수입원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비용 절감 차원에서 14%의 인력을 감축하기로 했어요. IMF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요. 그 일환으로 85개 해외 사무소가 반드시 필요한지 하나하나 검토 중입니다. 아직은 많은 나라에서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정확한 감축 규모를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15~30%의 해외 사무소가 문을 닫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의 경우 굉장히 빠르게 진행된 경우죠.IMF가 추진하는 개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IMF 자체의 지배 구조 개혁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회원국들에 투표권을 배정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지요. IMF에서 한국을 포함해 중국이나 터키 같은 신흥시장 국가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겁니다. 한국은 이를 통해 가장 많은 혜택을 받게 될 나라 중 한 곳이지요. IMF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좀 더 정당성을 확보한 국제기구로 자리 잡고 회원국들의 변화된 니즈를 적절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IMF는 설립 당시 회원국들의 상대적 경제 규모에 따라 투표권을 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어요. 1960년대 이후 이 방식에서 크게 변화된 게 없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됐지요. 한국이나 중국 브라질 멕시코처럼 경제적 규모가 성장하는데도 투표권은 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IMF를 1국가 1표인 유엔과 비교할 수는 없어요. 근본적으로 설립 취지가 다르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IMF는 2년간의 논의 끝에 지배 구조를 개선하기로 결정했어요. 앞으로 신흥시장 국가나 저소득 국가들이 IMF 내에서 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될 겁니다.터키 출생. 1990년 터키 보스포러스대 경제학과 졸업. 95년 미 보스턴칼리지 경제학 박사. 95년 터키 보스포러스대 조교수. 97년 IMF 이코노미스트. 2004년 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2006년 IMF 한국사무소장(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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