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시어머니 노릇… 재정난으로 9월 폐쇄

‘아듀! 국제통화기금(IMF)’. 오는 9월이면 IMF한국사무소가 폐쇄된다.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길고 길었던 ‘IMF 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역사적인 이벤트다. 그동안 IMF 한국사무소는 늘 뉴스의 중심에 있었다. 초기에는 ‘IMF 구조 개혁 프로그램’의 이행을 감독하는 깐깐한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IMF 신탁통치’라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이 차입금을 조기 상환한 이후에는 ‘친절한 조언자’로 변모를 시도했지만최근 자금난에 빠진 IMF가 인력 감원에 나서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됐다. 10년 전 한국에 고강도 구조 개혁을 압박했던 IMF가 거꾸로 자체 구조조정에 나서는 처지가 됐다는 것도 아이러니다.1998년 3월 23일. 한국 경제 정책의 심장부인 과천 정부청사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4층 419호실에 새로운 간판이 내걸렸다. ‘IMF한국사무소’. 3개월 전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한국 정부가 IMF에 약속한 구조 개혁 프로그램의 이행 상황을 감독할 현지 사무소였다. 애초 IMF와 교환한 의향서(Letter of Intent)는 ‘3년간 구조 개혁 프로그램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한국사무소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3년 뒤 다시 추가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개소식에 참석한 IMF 관계자는 “IMF 한국사무소가 가급적 빨리 문을 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한국 경제가 조기에 회생해 IMF의 금융 지원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면 자동적으로 한국사무소도 폐쇄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이즈음 이름이 바뀐 곳은 재경부 419호실 뿐이 아니었다. 서울 남대문 한국은행 본점에도 같은 이름의 사무소가 마련됐다. IMF가 한국 경제 정책과 통화 정책의 사령부를 ‘점령’한 셈이다.IMF ‘주둔군’은 의외로 단출했다. IMF의 한국 실사 단원으로 활동한 존 다스워스 IMF 인도 사무소장이 첫 소장을 맡았다. 다스워스 소장을 보좌하는 한국인 직원 2명을 포함해 모두 3명이 전부였다. 국내 외국계 은행의 외환과 수출 금융 부문에서 근무하던 심현숙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심 씨는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IMF 한국사무소의 산증인이다. 당시 심 씨는 인터뷰에서 “IMF가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국민들이 느끼는 고통을 실감한다”며 “다섯 살 난 아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 IMF 시대 다녀요’라고 말할 때 가장 당혹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210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빌리는 대가로 IMF에 제출한 구조 개혁 프로그램 이행 각서와 이면 각서는 ‘경제 주권’을 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률과 물가, 금리, 재정 목표치를 잡는 것에서부터 집행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감독을 받았다. 한국은 첫해인 1998년은 3개월마다, 그 이후에는 6개월마다 ‘정책 협의’라는 이름으로 교장실에 불려가 숙제 검사를 받는 문제 학생의 처지가 됐다.한국사무소는 구조 개혁 프로그램의 이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해 IMF 이사회에 보고하고 각종 경제 현안에 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하는 게 주임무였다. 다스워스 소장은 “‘빅딜’만으로는 구조 조정이 미흡하다”, “기아차 등 부실 기업 처리에 정부가 개입하거나 은행들이 특혜성 금리로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등 공개 발언을 통해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1999년 초 외환 당국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 발단이 돼 IMF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여졌다. 수출 경쟁력 확보에 우선순위를 두고 환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루 최고 2억 달러씩 외환시장에 투입해 달러를 매입하는데 IMF 한국사무소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IMF 본부는 당초 2월 중 지원하기로 한 2억 5000만 달러의 자금 집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한국 측이 재발 방지 약속 등을 수용한 4월에야 자금지원을 재개했다.IMF 한국사무소장은 언제나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금융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9년 말 다스워스 소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데이비드 코 소장이 “추가적인 콜금리 인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언하자 채권시장은 주저앉았다. 벤처 붐이 꺼지면서 주가 급락으로 주식 시장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던 2000년 5월 말. 코 소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 경제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고 있다. 왜 위기설이 나오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며 한국 경제의 위기설을 일축했다. 코 소장의 발언을 고비로 주식시장이 가까스로 안정 기미를 찾아가자 증권가에서는 “코 소장이 시장을 떠받쳤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장관이 수도 없이 한 이야기를 코 소장이 되풀이 했을 뿐인데 시장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한편으로 다행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씁쓸해 했다.2001년 8월 23일, 한국은 IMF에서 빌린 돈을 전액 상환했다.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차입금 잔액 1억4000만 달러를 최종 상환하는 서류에 결재하고 서명한 필기구를 화폐금융박물관에 남겼다. 애초 빌리기로 한 210억 달러 중 한국이 실제 인출해 쓴 돈은 195억 달러였다. 2004년 5월까지 갚으면 됐지만 이를 조기 상환한 것이다. 한국은 IMF에도 ‘큰 고객’이었다. 세계 11위 경제 대국이 구제 금융을 신청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IMF가 구제 금융을 준 나라 중에서도 지원 규모가 가장 컸다. 한국은 IMF의 가장 큰 성공 사례로 손색이 없었다.2001년 차입금 조기 상환과 함께 IMF 한국사무소의 사명도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빌린 돈을 다 갚은 마당에 ‘IMF의 잔재’를 굳이 남겨둘 필요가 있느냐는 폐쇄론이 힘을 얻었다. 2002년부터는 사후 모니터링 협의(PPM)를 받을 의무도 사라지고 사무소장 신분도 부국장급에서 부과장급으로 낮춰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경부는 “차입금 완전 상환으로 IMF의 정책 권고를 받을 필요는 없어졌지만 정보 교류와 협력을 위해 한국사무소 존속 기한을 1년간 연장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국 상황을 계속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IMF의 요청도 반영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기한 연장을 되풀이하면서 지금까지 왔다.2003년 9월, 폴 그룬왈드 소장에 이어 부임한 케네스 강 소장은 역대 한국사무소장 중 가장 특이한 인물이다. 재미교포 2세로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강 소장은 “IMF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겠다”며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열성을 보였다. 재경부에 ‘IMF스쿨 이코노미스트 과정’을 개설해 공무원을 대상으로 수준 높은 경제학 이론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IMF와 JP모건 홍콩지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건혁 재경부 장관 자문관(현 삼성전자 IR팀 상무)과 강 소장이 강사로 나섰다. IMF 한국사무소는 ‘깐깐한 감독관’에서 ‘독립적인 조언자’로 확실하게 색깔을 바꿨다.지난 4월 10일 IMF는 메랄 카라술루 현 소장의 임기가 끝나는 오는 9월 한국사무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사무소가 문을 닫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매년 계속되는 IMF의 자금난 악화였다. 2005년 말부터 최대 채무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원자재 값 급등으로 호황을 누리자 IMF에서 빌렸던 차입금을 차례로 조기 상환했다. 인도네시아 세르비아 우루과이도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IMF의 대출 규모는 전성기였던 1999년 820억 달러로 정점을 기록한 후 2006에는 204억 달러로 급감했다. 대출금 이자 수익에 의존하던 IMF는 올해 1억45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대형 외환 위기가 터지지 않는 한 IMF의 위기는 계속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IMF는 보유 중인 금을 내다 팔고 본격적인 인원 감축에 나서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등이 포함된 자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수익 모델도 발굴하고 있다. 그러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IMF의 긴급 대출에 매력을 느끼는 나라는 더 이상 많지 않다. ‘구조 조정의 전도사’인 IMF가 진짜 실력을 입증해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취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