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여야 힘겨루기…경제는 ‘삐걱’

경제 발목잡는 정치

도쿄의 벚꽃놀이(하나미·花見) 마지막 피크인 주말이었던 지난 4월 5~6일. 일본의 수도권 일대 고속도로는 그 어느 때보다 정체가 심했다. 마침 날씨가 화창했기도 했지만 최근 휘발유 값이 떨어져 너도나도 차를 몰고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휘발유 값은 4월 1일부터 리터당 평균 150엔에서 125엔으로 25엔 내렸다. 무려 17%나 인하된 것이다. 3월 말로 관련 세법의 시한이 만료돼 휘발유세가 폐지된 결과다.일본 정부와 여당은 휘발유세 시한 연장 법안을 제출했었다. 그러나 정권 흔들기에 여념이 없는 민주당 등 야당이 호락호락 응할 리 없었다. 휘발유세를 재원으로 한 도로특별재정의 방만한 운영을 문제 삼으며 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참의원(상원 격)에서 법안 심의를 거부했다. 법안은 국회에서 잠잤고, 그 사이 휘발유세 시한은 끝나 버렸다.여야의 정쟁 덕분에 일본인들은 ‘휘발유 값 인하’라는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맞았다. 하지만 휘발유세 폐지는 일본 경제를 골병들게 할 공산이 크다. 휘발유세가 포함된 재고분마저 가격 경쟁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싸게 팔 수밖에 없었던 주유소들은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주유소는 하루 평균 33kℓ의 재고를 갖고 있어 약 300억 엔(약 3000억 원)의 손실이 났다는 분석이다. 휘발유세로 도로 건설비 등을 지원 받던 지방 자치단체들에도 4월 한달간 600억 엔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중앙정부의 세수는 연간 2조6000억 엔이 펑크가 날 판이다. 소비세의 1%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렇지 않아도 막대한 재정 적자에 짓눌려 있는 일본 정부로선 큰 부담이다. 시장에선 정부가 적자 국채 발행을 늘릴 것이란 예상에 이미 금리 상승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그렇더라도 휘발유 값이 떨어지면 소비 진작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고? 천만에 말씀이다. 휘발유 값 인하로 근로자 가구의 가처분소득이 약간(0.3%) 늘어나는 건 맞다. 하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재정 악화 등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 오히려 소비가 위축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여야의 정쟁으로 일본 경제가 타격을 받는 사례는 또 있다. 지난 3월 20일부터 20일 가까이 공석이었던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총재 인선 문제다. 일본 정부가 3월 중순 잇따라 총재 후보 2명을 지명했지만 모두 참의원에서 야당의 반대로 무산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일본은행 총재 자리가 한동안 공백으로 있었던 것의 책임은 누가 뭐래도 ‘정치’에 있다. 1차적으로 정부·여당의 책임이다. 야당이 반대할 걸 뻔히 알면서도 재무성 출신 후보를 두 명이나 잇따라 지명했다. 야당은 일찌감치 ‘금융과 재정 정책의 분리’를 명분으로 재무성 출신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은 터였다. 그런데도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밀어붙였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심산과 야당의 반대로 일은 총재 공석 사태가 발생하면 책임을 야당 쪽으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민주당 등 야당이라고 잘한 건 없다. 야당의 잇단 일은 총재 임명안 반대를 순수하게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다케나카 헤이조 게이오대 교수는 “중앙은행 총재는 재무성 출신 여부보다 필요한 자질을 충분히 갖췄느냐를 따지는 게 중요하다”며 “야당이 정부안을 계속 반대해 부결시킨 건 후쿠다 정권 흔들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결국 일은 총재 공백 사태는 정치력도 없이 꼼수만 부린 정부·여당과 정권 투쟁에만 매달리는 야당 등 3류 정치권의 합작품인 셈이다. 가뜩이나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한 때 일은 총재 공백을 맞았던 도쿄 시장은 침울했다. 한 증권사 이코노미스트는 “여야 합의로 중앙은행 총재 하나 뽑지 못하는 일본의 정치 현실이 창피하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런 나라에 과연 투자하겠느냐”고 말했다.작년의 건축기준법 개정에 따른 혼란도 비슷한 케이스다. 정부가 내진 설계 검사를 갑자기 강화한 이 법안 때문에 작년 여름부터 일본에선 주택 신축이 급감했다. 지금까지 도산한 건설 회사만 35개사다. 주택 착공이 줄어 50만 명의 고용 기회가 사라졌다는 계산도 나왔다. 시장 충격을 감안하지 않은 전형적인 아마추어 정치·행정의 피해 사례다.미쓰이물산의 우쓰다 쇼에이 사장은 “만약 기업 입장에서 투자하려는 나라의 정치가 지금 일본과 같은 상황이라면 투자를 보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일본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크게 줄었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2007년 상반기 약 2조2000억 엔에 달했지만 하반기엔 5000억 엔으로 급감했다. 특히 11월과 12월엔 투자 철수액이 유입액을 웃돌아 유출 초과 현상을 나타냈다.미국 경기 침체와 국제 금융시장 불안으로 그렇지 않아도 살얼음판인 일본 경제에 ‘폴리티컬 리스크(정치 위험)’까지 가세하자 경제계에선 탄식이 나온다. 미타라이 후지오 게이단렌 회장은 “정치와 경제라는 수레의 두 바퀴 중 정치가 제대로 돌지 못하고 있다”며 “그로 인해 경제마저 삐걱거리면 ‘정치 불황’이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후쿠다 내각의 인기는 바닥이다. 일본의 보수 우익 언론인 산케이신문과 후지TV가 지난 4월 2~3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후쿠다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23.8%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각 언론사의 후쿠다 내각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이미 ‘포스트 후쿠다’에 대한 예측이 더 관심을 모은다. 일본의 차기 총리감으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가장 인기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산케이신문과 후지TV 조사에서 ‘총리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물은 데 대해 고이즈미 전 총리를 꼽은 응답자가 21.9%로 가장 많았다. 아소 다로 전 외상은 15.9%,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는 11.4%였다. 후쿠다 총리는 6%에 불과했다.후쿠다 총리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알기 쉬운 슬로건으로 우정 민영화 개혁 등을 밀어붙였던 고이즈미 전 총리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10년 불황’에서 일본 경제를 건져낸 건 정치였다. 2002년 집권한 고이즈미 전 총리의 과감한 규제 완화와 구조 개혁이 경제 회생의 발판이 됐다는 건 상식이다. 그는 한국의 수도권 규제나 출자 총액 제한과 같은 기업 규제를 다 풀었다. 우정 민영화 등 공공 부문 개혁도 밀어붙였다. 그것이 민간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경제를 꿈틀거리게 만들었다.실제 지난 2002년 집권한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내세워 규제 철폐에 ‘올인(다 걸기)’했다. 일본 정부가 지난 2001년까지 무려 11차례에 걸쳐 135조 엔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재정 자금을 경기 부양에 투입했지만 실패한 뒤였다.일본 정부는 2001년 이후 대기업·노동·창업 등 분야에서만 총 1500여 건의 규제를 풀었다. 2002년 ‘공장 제한법’을 폐지한 데 이어 2006년엔 ‘공장재배치촉진법’을 없앴다. 이 두 법은 우리나라의 수도권 규제법과 똑같은 것이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출자 총액 규제의 모델로 삼았던 ‘대규모 회사의 주식 보유 총액 제한 제도’도 2002년 철폐했다. 기업들의 원활한 구조 조정을 위해선 합병 절차를 간소화하고 연결결산제도를 도입했다.규제 완화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해외로 나갔던 기업들이 일본으로 유턴(U-turn)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의 공장 착공 면적은 지난 2002년 850만㎡였던 게 △2003년 930만㎡ △2004년 1250만㎡ △2005년 1410만㎡ △2006년 1570만㎡ 등으로 계속 늘었다. 일본 정부가 지난 15년간 단행한 규제 완화로 얻은 경제적 효과는 18조3000억 엔(약 180조 원)에 달한다는 게 내각부의 분석이다. 이렇게 일본 경제를 살렸던 정치가 다시 일본 경제를 죽이고 있는 건 아이러니다. 경제를 살리는 정치인지, 죽이는 정치인지를 선택하는 건 결국 국민에게 달려 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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