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잇감 찾아라’…사모펀드 등 잰걸음

꿈틀대는 월가 사냥꾼

월가의 ‘간판선수들’이 바빠졌다. 베어스턴스를 거저먹은 JP모건체이스는 다른 은행을 노리고 있다. 워런 버핏은 이미 채권보증업에 입성했다. 벌처 투자가로 유명한 윌버 로스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업체를 인수한데 이어 금융회사를 타깃으로 정했다. 그런가 하면 사모 펀드들도 각종 채권을 헐값에 사들이는 등 오랜 휴지기를 털고 본능을 작동하기 시작했다.비단 간판선수들만이 아니다. ‘장삼이사’ 투자자들도 손놀림, 머리 굴림이 한창이다. 다름 아닌 입에 맞는 주식을 찾기 위해서다. 뉴욕 증시 주변에 쌓이는 대기 자금은 바로 이런 현상의 반영이다.‘큰손’이나 ‘작은손’이나 바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돈이 움직인다는 의미다. 꽉 막힌 돈 흐름이 서서히 물꼬가 트인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신용 위기는 최악을 지났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제임스 다이몬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이번 신용 위기에서 ‘월가의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떠오른 인물이다. 지난 3월 16일 위기에 처한 베어스턴스를 전격 인수하면서 위기론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 주인공으로 칭송된다.그렇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다이몬은 베어스턴스 딜에서 수혜자다. 그는 당초 베어스턴스를 인수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3월 16일 간밤의 실사 결과 베어스턴스는 주당 23달러를 받아야겠다고 버텼다. 다이몬의 결론은 ‘불가’였다.다급해진 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였다. 가이스너 뉴욕 연방은행 총재가 직접 나서 다이몬을 설득했고 다이몬은 못이기는 척 이를 받아들였다. 전리품은 엄청났다. 인수 가격은 주당 10달러. 게다가 FRB로부터 300억 달러의 자금까지 지원받기로 했다. 한마디로 손 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었다.그렇지만 다이몬은 행운아가 아니었다. 이미 이번 위기를 활용해 다른 금융회사를 인수하려고 잔뜩 노리던 차였다. 첫 번째 먹잇감은 미 최대의 저축대부조합인 워싱턴 뮤추얼. 베어스턴스를 인수하기 직전인 지난 3월 다이몬은 워싱턴 뮤추얼의 케리 킬링거 최고경영자(CEO)로부터 급전을 받는다. “자금난으로 은행이나 사모 펀드에 매각하려는 협상을 갖고자 한다”는 게 골자. 다이몬은 찬스다 싶어 워싱턴 뮤추얼에 대한 실사를 진행했다. 결론은 주당 8달러, 총 7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다이몬의 야심은 워싱턴 뮤추얼이 인수 가격이 너무 낮다고 거절함으로써 좌절됐다. 워싱턴뮤추얼은 JP모건 대신 TPG라는 사모 펀드로부터 70억 달러를 유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런 경험이 있는 터라 베어스턴스에 대한 인수 결정이 의외로 빨랐던 것으로 전해진다.그렇다면 다이몬은 베어스턴스로 만족할까. 아니다. 다이몬은 여전히 금융회사 인수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선트러스트 뱅크 등 지역 대형 은행이 1차 타깃이라는 전망이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위기를 넘겼다고 하지만 지역은행들은 상당한 위기를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때 헐값에 은행을 집어 먹겠다는 속셈이다.지역은행을 노리는 건 다이몬만이 아니다. 벌처 투자 전문가로 유명한 윌버 로스도 은행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로스는 최근 “이번 위기의 다음 국면은 예금기관들의 파산일 것”이라면서 “이것이 다음 투자 대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부다비와 쿠웨이트가 소도시 은행들까지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대형 은행들은 국부 펀드 등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고 있지만 지방은행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강조했다.로스는 작년 말 서브프라임 모기지 업체인 H&R 블록을 11억 달러에 인수하고 지난 2월 말 채권 보증 업체인 어슈어드 개런티 주식 10억 달러어치를 사들이는 등 벌처 투자가다운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다이몬이나 로스의 타깃처럼 증시에서도 금융주를 노리는 투자자들이 많다. 이들은 대형 투자은행의 경우 위기를 넘긴 게 분명한 만큼 지금쯤 주식을 사두면 상당한 차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한다. 다음 투자 대상은 금융주라는 얘기다.신용 위기로 사모 펀드와 헤지 펀드가 된서리를 맞았다. 주로 자금을 차입해 기업들을 인수해 온 사모 펀드들은 대출 창구가 얼어붙으면서 개점휴업에 들어갔다. 돈을 빌리지 못하니 기업 인수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존에 빌린 돈을 상환하라는 독촉은 심해져 오히려 자금 압박을 받기도 했다.납작 엎드려 있던 사모 펀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의 전공대로 각종 채권이나 주식을 싼값에 사들이고 있다. 씨티그룹은 120억 달러의 레버리지론(차입 대출)을 아폴로매니지먼트 등 3개 사모 펀드에 매각하는 협상을 거의 마무리 지었다. 씨티로서는 부실 가능 자산을 처분하고 현금을 확보하게 돼 한층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지만 따지고 보면 남는 장사는 사모 펀드가 한 것으로 보인다.씨티그룹이 팔기로 한 레버리지론의 가격은 10% 할인 가격. 1달러를 90센트에 팔기로 했다. 이를 인수한 사모 펀드들은 레버리지론이 잘못되지만 않는다면 앉아서 10%의 수익을 챙길 수 있게 됐다. 이자까지 감안하면 상당한 수익이다. 만일 잘못되더라도 10% 내에서 막을 수 있다면 잃을 게 별로 없게 되는 셈이다.비단 이들 사모 펀드만이 아니다. 또 다른 사모 펀드인 매틀린패터슨은 파산 위기에 처한 모기지 회사 손버그로부터 4억5000만 달러어치의 채권을 사들이기로 했다. 18%의 이자와 함께 손버그 주식을 주당 1센트에 사들일 권리를 얻었다. 손버그가 망하지만 않는다면 엄청난 수익을 챙길 기회를 챙겼다. 또 대표적인 사모 펀드인 블랙스톤은 100억 달러의 부동산 펀드를 조성해 시장에 나오는 압류 주택 등을 헐값에 사들이는 작업에 착수했다.본능적으로 돈 흐름에 민감한 사모 펀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한마디로 그만큼 투자 여건이 조성됐다는 걸 암시한다. 이들이 사들인 채권의 경우 발행 회사가 잘못되면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권을 매입한 것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따른 것이다. 특히 아폴로 등의 씨티그룹 레버리지론 매입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레버리지론은 일종의 대출 채권이다. 말 많고 탈 많은 부채담보부증권(CDO)의 일종이다. 결국 레버리지론이 팔렸다는 건 CDO가 매매됐다는 뜻이고, 이는 사망한 것과 마찬가지던 CDO 시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CDO 시장이 움직인다는 것은 신용 경색이 그만큼 완화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그렇다면 이런 움직임은 어떻게 나왔을까. 이에 대해 손성원 캘리포니아 주립대 석좌 교수는 “주식을 살 때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손 교수는 “미 주택 경기의 바닥이 임박했으며 지금 주식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주택을 살 수 있는 여력을 나타내는 미 주택보유능력지수가 3년 만에 처음으로 상승세로 돌아서고 기존 주택 판매가 증가세를 보이는 등 주택 경기가 바닥에 도달하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며 “주택 경기가 바닥을 치면 미 경기도 하반기부터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이를 감안할 때 경기선행지표인 주식시장은 지금쯤 바닥에 근접했다고 봐야 한다”는 게 손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특히 “과거 사례를 보면 경기 침체 국면에서 바닥을 친 경우가 많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969년 이후 발생한 다섯 차례의 경기 후퇴 국면에서 2001년 닷컴 버블 때를 제외한 4차례 모두 경기 회복 1~2분기 전에 주식시장이 바닥을 쳤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손 교수는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족집게 애널리스트다. 따라서 그의 전망은 상당한 무게감을 갖고 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뉴욕 증시와 궤적을 같이하는 한국 증시도 지금이 살 때다. 물론 바닥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월가 선수들의 움직임이 빨라진 걸 보면 바닥이 가까워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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