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산업 ‘역사’…글로벌기업 ‘우뚝’

1957년. 락희화학 구인회 사장은 한 직원에게 “우리가 전자제품을 만들면 어떨까”라고 물었다. “우리 기술 수준이 낮아서”라는 우려섞인 대답이 돌아오자 구 사장은 “기술이 없으면 외국에서 배워오고 아니면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LG전자가 3월 27일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한국 전자산업의 역사는 LG전자의 설립을 시작으로 한다. 창업주의 전자제품 개발에 대한 의지는 1958년 3월 27일 LG전자(당시 금성사)가 모습을 보이면서 열매를 맺었다.이후 1년여의 노력 끝에 1959년 11월 한국 전자 산업의 ‘효시’인 국산 라디오 ‘A-501’을 출시하며 전자제품 국산화의 물꼬를 텄다.LG전자는 적극적인 투자와 끊임없는 기술 개발로 ‘국내 최초’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라디오 선풍기 전화기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카세트녹음기 전자레인지 등 회사가 만드는 전자제품 모두가 ‘국내 최초’였다.1966년 8월에는 국산 흑백 TV가 세상에 나왔다. 라디오에 이어 LG전자가 7년 만에 이룬 또 하나의 쾌거였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역사가 한 단계 도약했음을 알리는 이정표였으며 우리나라가 영상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당시 19인치 흑백 TV의 가격은 6만8000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5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지만 생산량이 모자라 공개 추첨을 통해 당첨자에게만 판매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LG전자는 이후 1968년 미국 뉴욕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글로벌 경영’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8년 12월에는 국내 가전 업계 최초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창업 20년 만의 일이었다.4년 뒤인 1982년 10월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에 생산법인을 설립했다. 첫 해외 생산기지는 미국 앨라배마 주 헌츠빌 지역이었다. 헌츠빌 공장의 성공 사례는 당시 한국적 경영의 성공 사례로 평가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는 헌츠빌 법인의 성공 사례를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한국적 경영을 주제로 한 연구와 세미나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헌츠빌의 성공을 계기로 LG전자는 해외 진출을 점차 확대했다. 현재 LG전자의 해외법인 수는 82개에 이른다.1995년에는 미국 최대 가전회사였던 제니스를 인수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미국의 자존심이 아시아의 한 전자 회사에 무너졌다. 부끄러운 날이다’라며 대서특필했다. 제니스는 올해 디지털 TV 로열티로만 약 9000만 달러를 벌어들여 ‘LG전자의 효자’로 거듭나고 있다.매출 5000만 원에서 41조 원으로50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1959년 5000만 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41조 원으로 늘었다. 창업 당시 1000만 원이었던 자본금은 지난해 기준 7조2000억 원으로 늘었다. 1962년 5만 달러였던 수출액은 지난해 183억 달러로 성장했다. 300명이었던 임직원 수는 8만2000명에 이른다. 특히 1962년 2900만 원의 순이익을 내고 지난해 1조2000억 원의 순이익을 내기까지 1980년 한 해를 제외하고 모두 흑자를 낸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맞은 LG전자는 향후 50년을 위해 대대적인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할 방침이다. 82개에 달하는 해외법인을 통해 인종,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선발하고 ‘사내 영어 공용화’에 열을 올리는 것도 ‘선진 다국적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포석이다.기업의 성격도 ‘전자제품 생산업체’가 아닌 ‘종합 멀티미디어 정보기술(IT) 기업’으로 바뀌고 있다. 이미 LG전자는 가전제품이 아닌 휴대전화와 디스플레이 제품을 중심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50주년 기념사에서 “고객을 위한 가치 창출로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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