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번?’ 법정 대만원… 다세대 ‘인기 최고’

부동산 경매는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있는 세계였다.아무나 할 수 없는, 잘못하면 큰일 나는 게 경매인 줄 아는 이가아직도 적지 않다. 어렵고 복잡한 법 문제가 얽혀 있고법원에서 손 바뀜이 이뤄지니 가벼이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은 물론대학을 갓 졸업한 앳된 아가씨, 집에서 살림만 하던전업주부까지 경매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요즘 서울 수도권의 경매 법정들은 ‘대박’을 꿈꾸는투자자들로 대만원이다.부동산 경매란…경매는 돈을 빌린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을 압류, 돈으로 바꾸어 그 매각 대금으로 채권을 만족시키는 강제 집행 절차다. ‘법원경매’라고 해야 옳지만 보통 ‘부동산 경매’라고 한다.각 지역 법원이 해당 지역 물건의 집행을 맡으며 누구나 경매에 참여해 원하는 부동산을 낙찰 받을 수 있다. 법원경매 정보는 대법원 법원경매 정보 사이트(www.courtauction.go.kr)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국의 경매 물건과 일정, 경매 진행 절차 등의 정보가 수록돼 있다.지난 3월 18일 오전 서울 서부지방법원 경매 법정 앞. 20대에서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가 수십m 줄을 서 있다. 자신이 써 넣을 입찰가를 머릿속에 되뇌며 순서를 기다리는 얼굴들이 자못 심각하다. 법정 바깥에선 경락잔금대출을 받으라며 업체 명함을 돌리는 이들이 분주하다.오전 10시에 시작하는 입찰은 보통 11시 10분에 마감 하지만 이날은 입찰자가 대거 몰리면서 정오가 가까워서야 마무리됐다. 뒤이어 개찰과 최고가 매수인(낙찰자) 호명 등이 이어지고 오후 3시가 넘어서자 비로소 경매가 종결됐다.이날 경매에 부쳐진 물건은 서울 용산구·서대문구·마포구·은평구 일대에서 나온 총 33건의 부동산. 일부 다세대주택에는 30명이 넘는 입찰자가 몰려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서부지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입찰자가 많아지면서 종결 시간이 계속 늦어지고 있다”면서 혀를 내둘렀다.이보다 2개월 앞선 지난 1월 14일 서울 남부지방법원 경매에서는 구로구 오류동 역세권 오피스텔 138가구에 무려 1320명이 응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오피스텔은 2005년 지어진 15층 건물로, 건설회사가 채권 회수를 위해 경매를 신청한 것이었다. 분양이 안 된 새 오피스텔이어서 임차인이 없고, 유찰이 거듭되면서 최저 입찰가가 떨어진 것이 인기 요인이었다. 인산인해 입찰자들 덕분에 이날 경매는 저녁 9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올 들어 부동산 경매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시세보다 싼값에 부동산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알려지고 새 정부 출범 이후 부동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부동산 경매를 재테크 수단으로 선택하는 이가 빠르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폭증’이라고 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참여자가 늘어나는 추세다.이는 서울 수도권 경매 법정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특히 2~3년 전만 해도 거들떠보는 이가 드물었던 소형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에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다. 덕분에 경매시장에선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록’이 쏟아지는 중이다. 입찰자가 늘어나면서 낙찰가율, 입찰 경쟁률 등 거의 모든 경매 관련 지표가 전에 없이 고공 행진하고 있다.디지털태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경매 입찰 경쟁률은 연립·다세대주택, 소형 아파트를 중심으로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15일 기준 연립·다세대주택 입찰 경쟁률은 11.31 대 1로 사상 최고치였다. 아파트도 9.49 대 1로 만만치 않았다. 특히 연립·다세대주택은 2년 전인 2006년 3월의 5.34 대 1에 비해 2배 이상 뛰어올랐다.입찰 경쟁이 치열해지자 낙찰가율(감정가 대비 낙찰가 비율)도 덩달아 뛰고 있다. 3월 15일 기준 낙찰가율이 가장 높은 종목은 연립·다세대주택으로 113.81%에 달한다. 감정가보다 13% 이상 높은 금액에 낙찰됐다는 이야기다. 2년 전 낙찰가율이 77.28%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상승세다.이처럼 연립·다세대주택과 강북 소형 아파트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비교적 소액으로 접근할 수 있고 향후 미래가치도 높게 매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연립·다세대주택은 뉴타운, 재개발을 겨냥한 지분 투자의 수단으로 인기가 높다. 이영진 디지털태인 이사는 “뉴타운, 재정비촉진지구 등의 호재가 있는 지역의 소형 주택 매물은 물건 1건에 입찰자가 보통 20~30명 선”이라면서 “재개발구역에 토지 20㎡ 이상을 구입할 때는 거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경매를 통하면 규제를 피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어서 투자자가 몰린다”고 밝혔다.경매에 처음 입문하는 초보 투자자가 늘어난 것도 연립·다세대주택 인기와 관련이 있다. 초보 투자자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가격이 낮은 물건을 찾을 수밖에 없고, 임대로 운용이 가능한 연립·다세대주택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또 경락잔금대출을 이용하면 투자금의 절반 이상을 대출로 충당할 수 있어서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도 있다. 제2·3금융권을 이용하면 낙찰가의 90%까지도 대출이 가능해 자기 자본이 적게 들어간다.결국 소액으로 미래 가치가 높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점이 어필하면서 부동산 경매시장에 투자자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경매 고수로 이름이 높은 우형달 GMRC 사장은 “초보 투자자 유입이 많아지고 주식과 펀드로 쏠렸던 자금이 회귀하면서 부동산 경매시장이 들썩이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새 정부 출범 이후 기대 심리가 높은 만큼 서울 수도권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당분간 열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이런 흐름은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변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경매는 ‘특정 수요자’만의 세계라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조폭들이 입찰에 개입해 일반 투자자의 낙찰을 막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그러나 1993년 5월 입찰 제도가 호가제에서 서면제로 바뀌면서 풍토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물건이 폭주했지만 이후 부동산 시장이 되살아나면서 큰 폭의 시세 차익을 증명한 뒤로는 재테크 수단으로 집중 조명받기 시작했다.2002년 7월에는 항고 시 보증금 공탁 의무화 제도, 기간 입찰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민사집행법이 시행되면서 일반 투자자도 수월하게 경매 투자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업계에서는 이 시기를 대중화 1기로 보고 있다. 여기에 공인중개사의 입찰 대리가 허용되면서 투자 안정성이 한층 높아진 게 대중화의 기폭제가 됐다.2005년 전후부터는 백화점 문화센터 등 각종 재테크 강좌에서 부동산 경매 과정이 만들어지면서 교육에 따른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는 동호회가 만들어져 정보를 주고받으며 공동 투자의 형태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다음 카페의 ‘경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2만8000명이 넘는 회원 수를 자랑하는 대형 동호회로 유명하다.지난해부터 눈에 띄는 움직임은 초보자를 위한 경매 서적이 잇달아 출간돼 저변이 더욱 넓어지는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투자자의 생생한 체험을 담은 ‘말랑말랑한’ 경매 서적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면서 커다란 인식 전환의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저자들이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이라는 점도 이채롭다.이미 출판가에선 부동산 경매가 ‘인기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2권의 부동산 경매 서적을 출간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미래지식 출판사의 박수길 사장은 “‘나는 쇼핑보다 경매 투자가 좋다’라는 책이 나온 후로 읽기 쉽게 풀어 쓴 경매 지침서가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경매가 대중화 단계를 거치면서 투자 지침서도 차별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일반적인 경매 투자자 유형은 인터넷을 이용해 경매 정보를 취득하고 발로 뛰는 현장 조사를 거쳐 입찰에 응하는 것이다. 덕분에 권리 관계 등 경매 물건 정보와 함께 현장 사진, 수익성 분석 등을 제공하는 경매 정보 사이트는 나날이 회원 수가 늘고 있다. 현재 디지털태인, 지지옥션, 굿옥션 등이 대표적인 경매 정보 제공 업체로 지명도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디지털태인은 지난 한 해 동안 유료 회원 증가율이 120%에 달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영진 디지털태인 이사는 “최근 6개월간 인근 지역 낙찰 사례를 통한 적정 낙찰가 분석, 금융 및 기회비용을 고려한 수익 분석 기능까지 제공하고 있어 경매 초보자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지지옥션은 신혼부부를 겨냥한 경매 서비스 상품과 민간 경매 상품을 내놔 주목받고 있다. ‘신혼집 경매로’라는 상품은 신혼부부들이 전세 자금으로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료 서비스를 말한다. 44만 원을 내면 전담 매니저가 5건의 경매 물건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제공해 투자를 도와준다.하지만 최근의 부동산 경매 열풍에 대해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특히 부동산 전반에 투자 경험이 적은 초보 투자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갖가지 부작용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섣불리 입찰을 받았다가 치명적인 문제 때문에 입찰 보증금을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황지현 영선법률사무소 경매실장은 “최근 서울 5개 지원에서 1개월 동안 입찰 보증금을 포기한 금액을 계산해보니 144억1000여만 원이나 됐다”면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낙찰을 받아 금쪽같은 보증금을 날리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초보자는 입찰가 산정, 권리 분석 등에서 실수하는 일도 잦다. 최근에는 경매시장 과열로 감정가 대비 100%가 넘는 물건이 수두룩한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반 부동산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주고 사는 셈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등기, 집행 비용을 염두에 두고 입찰가를 써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또 낙찰 받은 주택에 살고 있는 세입자 등을 내보내는 과정인 명도의 어려움도 초보자에겐 큰 난관이다. 황 실장은 “낙찰 받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내보내는 명도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경매가 끝나는 것”이라면서 “경매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수익성이 예전만 못해져 경매 투자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우형달 GMRC 사장은 “3~4년 전에는 서울 수도권 구도심의 연립·다세대주택의 투자성이 아주 높았지만 지금은 너무 올랐다”면서 “초보 투자자와 경쟁하지 않는 물건으로 이동하는 게 수익률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밝혔다.앞으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참여자가 크게 늘어난 반면 물건 수는 줄어들고 있어 입찰 경쟁률 상승세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낙찰가율이 더 올라가면 결국 수익성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부동산 경매 물건은 지난 2000년 54만 건으로 최고를 기록했다가 점점 줄어들어 지난해에는 31만6000건 정도에 불과했다. 업계에선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조금 늘어난 33만 건 정도가 출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취재=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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