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지갑 닫히면 큰 일…증시도 ‘흔들’

소비심리가 정책 방향 좌우…블랙 프라이데이 출발은 ‘일단 안심’

분위기가 좋지 않다. 들려오는 것은 좋지 않은 소리뿐이다. 다름 아닌 미국 경제 얘기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와 민간 연구소 등이 잇따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급기야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내렸다. 겉으론 인플레이션과 경제 성장 사이에서의 ‘중립적인 통화 정책’을 강조한다. 그러나 내심으론 경기 하강 가능성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사실 돌아봐도 좋은 여건이 없다. 주택 경기 침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한 숨 돌린 것 같았던 신용 위기도 마찬가지다. 금융회사들의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신용 경색이 쉽게 풀릴 조짐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여기에 고유가와 약달러도 문제다. 약달러는 그나마 낫다. 인플레이션이 염려되지만 아직은 아니다. 용케도 수출에만 도움을 주는 긍정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고유가는 다르다. 소비 심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결국 관건은 소비다. 미국 경제가 그런대로 버티고 있는 것은 견조한 소비 덕분이다. 소비마저 무너지면 기댈 언덕이 없다. 경기 침체(recession)가 현실화될 공산이 커진다.미국에서 연중 최대의 쇼핑 시즌이 시작됐다. 추수감사절부터 연말까지가 최대 쇼핑 시즌이다. 소매 업체 매출의 70%가 이때 발생한다. 한 해 장사가 이때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과연 연말 쇼핑 시즌의 매출이 어떨지 여부가 앞으로 미 경제를 가늠할 시금석으로 떠올랐다. 증시도 이에 따라 움직일 것은 물론이다.◇ FRB는 지난 10월 3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압력과 경기 둔화 가능성을 종합해 결정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른바 ‘중립적인 통화 정책’으로의 전환이었다. 시장에서는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이 희박해진 것으로 판단했다.그러나 웬걸. 막상 당시 FOMC 의사록이 공개되니 내용이 달랐다. FOMC 위원들은 한목소리로 경기 둔화 가능성을 염려했다. “경제 전망에 심각한 하강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경제 활동의 예상치 못한 둔화를 미리 방지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였다. 주택 경기 침체와 신용 위기, 고유가라는 이른바 ‘3대 악재’가 경제에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가 회의 분위기를 지배했다.이런 분위기는 FRB의 경제 전망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FRB는 내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8~2.5%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FRB가 지난 7월 전망했던 2.5∼2.75%보다 낮아진 것이다.대신 내년 실업률 전망치는 당초 4.75%에서 4.8~4.9%로 높여 잡았다. 반면 변동성이 심한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PCE(개인소비지출) 가격지수 상승률 예상치는 종전의 1.75~2%에서 1.7~1.9%로 낮췄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낮아지는 대신 성장률은 둔화되고 실업률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 셈이다.FRB는 “2009년 성장률은 2.3~2.7%, 2010년 성장률은 2.5~2.6%에 달할 것”이라며 “경제가 연착륙에 성공하겠지만 확장 국면으로 쉽게 돌아서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FRB도 경기 하강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통화 정책을 운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한 셈이다.그러다 보니 12월 11일과 내년 1월 30일 열리는 FOMC에서 기준금리를 잇따라 내릴 것이란 관측이 확산되고 있다. 다행히 달러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은 아직 크지 않다. 금리를 추가로 내릴 여지는 상당하다. 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은 증시엔 호재다. 그렇지만 그 근저엔 경기 둔화 가능성, 더 나아가 성장률이 2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침체 가능성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환영할만한 일은 못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참가자들이 주목하는 건 연말 쇼핑 시즌이다. 경제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70%인 소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비가 살아 있으면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는 덜 수 있다. 반면 소비마저 무너져 내린다면 침체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진다.연말 쇼핑 시즌을 알리는 신호탄은 다름 아닌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다. 미국에선 추수감사절이 최대 명절이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이다. 이를 계기로 각 소매 업체들은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시작한다. 추수감사절은 명절인 만큼 쉰다. 대신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금요일부터 세일이 시작된다. 할인 폭이 워낙 커 이날은 난리도 아니다. 매장 앞에 밤을 새우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날을 계기로 소매 업체들의 한 해 실적이 ‘흑자(black)’로 돌아선다고 해서 블랙 프라이데이란 이름이 붙었다.올 블랙 프라이데이는 23일.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화점등이 몰려 있는 각종 쇼핑몰에는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업체가 문을 열자 이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리곤 달리기 경주하듯 매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왕창세일’ 상품을 선점하느라 곳곳에서 승강이가 빚어졌다. 부딪치고 쓰러지고 환호하고 아우성치고. 쇼핑객들은 그렇게 23일 아침을 맞았다.1000달러가 넘는 대형 TV를 300달러에, 500달러를 웃도는 냉장고를 단돈 100달러에 파니 쇼핑객들로선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물론 수량이 한정돼 있지만 말이다. 이런 열풍은 23일에 그치지 않았다. 일요일인 25일까지 3일간 ‘쇼핑 열풍’은 계속됐다. 이 기간에 쇼핑에 나선 사람은 줄잡아 1억5000만 명으로 추산됐다.블랙 프라이데이는 끝이 아니다. 시작에 불과하다. 세일은 크리스마스와 연말까지 계속된다.이 기간에 소매 업체 1년 매출의 70%가 이뤄진다. 소매 업체들로선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소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증시도 역시 연말 쇼핑이 어느 정도인가에 잔뜩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월마트 베스트바이 등 대표적 소매 업체들의 블랙 프라이데이 매출은 그래도 예년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아직까지는 소비 심리가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변수는 유가다. 미국에서 휘발유 값은 소비 심리의 바로미터다. 휘발유 값이 오르면 여행도 가지 않을 정도다. 임계점은 대략 갤런(3.7리터)당 3달러선. 그런데 최근 휘발유 값이 3달러를 넘었다. 지난 18일 현재 전국 평균 휘발유 값은 3.09달러. 사상 최고치에 근접해 버렸다.작년 블랙 프라이데이 때 휘발유 값은 갤런당 2.2달러였다. 이와 비교하면 1달러가량 오른 셈이다. 따라서 유가가 연말 소비 행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련 업계는 잔뜩 주목하고 있다.물론 소비에 미치는 변수는 많다. 당장 주택 경기 침체가 그렇다. 주택 경기 침체로 집을 압류당하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가용자금이 줄어든다. 미국 내 1, 2위 주택 용품 판매 업체인 홈데포와 로스는 순이익이 이미 큰 폭으로 줄었다. 지난 3분기 중 홈데포의 순이익은 27% 감소했으며 로스의 순이익도 역시 11% 줄었다.경기 둔화 조짐도 소비 심리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세계 최대 커피 전문점인 스타벅스도 매출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처음으로 TV 광고를 시작했을 정도다. 또 메이시백화점과 JC페니 등 대표적 소매 업체도 연말 매출이 신통치 않을 전망이라고 밝히기도 했다.그렇지만 아직 비관할 단계는 아니다. 소비 심리 위축에 대한 우려는 많지만 통계적으론 그런대로 괜찮다. 특히 세계 최대 소매 업체인 월마트가 그럭저럭 양호하다. 월마트의 지난 10월 점포당 매출은 소폭 증가했다. 연말 매출도 작년보다 2%가량 늘어날 것이란 게 자체 전망이다. 월마트는 소비 위축에 대비해 연말 ‘왕창세일’을 예년보다 일찍 시작했다. 지난 8월부터 일부 품목에 대해선 할인을 실시 중이다. 이 영향 때문도 있지만 그래도 연말 매출이 늘어날 전망이라니 소비 심리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현재로선 그렇다.미국은 소비의 천국이다. 소비가 죽으면 경제도 죽는다. 다행히 연말 쇼핑 시즌 출발은 괜찮은 것으로 평가된다. 소비를 뒷받침하는 고용 사정도 여전히 양호하다. 그렇지만 고유가 등 변수는 많다. 언제 어느 때 소비 심리가 얼어붙을지 모른다.미국 경제의 움직임과 뉴욕 증시의 흐름을 알기 위해선 반드시 연말 소비 심리를 관찰해야 할 이유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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