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닮아가는 ‘법 없이도 살 사람’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참으로 무수한 낱말이 뒤엉킨다.아버지는 어머니 산소에 가는 길에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치매 증세가 시작된 아버지 때문에 아들과 며느리가 고생할까봐 어머니가 모셔간 것이라고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위로했다.중풍으로 3번이나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온 식구의 정성으로 아버지 혼자 산책하고 가벼운 산행을 할 정도로 쾌차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술 취한 운전자에게 참화를 당한 것이다.분노한 나는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그 운전자를 죽이고 싶었다. 아침에서야 유치장에서 범인을 만날 수 있었다.나는 다짜고짜 그를 죽도록 팰 작정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범인이니 뼈를 부러뜨려도 정당방위쯤으로 참작되리라는 생각도 했다.형사에게 이끌려 유치장 문을 나선 범인은 나와 마주친 순간 오들오들 떨었다. 처참한 표정, 하늘이 무너진 듯한 눈시울, 곧 쓰러질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은 땅바닥에 두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다가서 범인을 끌어안았다.그리고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말을 지껄였다. 용서한다고, 내가 복이 없어 아버지를 잃었노라고, 제발 떨지 말고 내가 도와 줄 테니 기운 내라고….지금도 그 순간에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누군가 내 입을 그렇게 열어주었고 누군가 내 몸짓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경찰에게 범인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뒤 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친지 한 사람이 내게 언성을 높였다.“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대를 이어 원한을 풀라고 했는데, 너는 유명하다고 해서 원수를 용서했느냐. 불효이자 배은망덕이 아니냐?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장례 중에 마음이 괴로워 인생의 가르마를 타준 선배한테 그 사실을 털어놓고 하소연했다. 선배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실 것 같은가?”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그냥 용서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자네가 옳았네.”그 한마디에 답답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떠올렸다.아침에 월사금 달라면 말없이 나갔다가 저녁에 내 손에 월사금을 쥐어주면 그만일 만큼 말수가 적었다.오죽하면 우리 집에 다니러 왔던 친할머니가 ‘내가 싫어서 말 한마디 않는다’며 화를 내셨겠는가.아버지는 술을 매우 즐겼다. 만취한 날은 어김없이 구수한 노랫가락을 뽑으며 흥을 돋우고 자식들에게 말문을 텄다.밤 이슥토록 한 말 또 하고 옛 이야기와 가문과 바르게 사는 법을 늘어놓으셨다.아버지의 과거와 생각과 삶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음에도 나는 그런 아버지를 피하려 했다.만취해 밤새 식구들을 괴롭힌 날 아침에는 어머니의 훈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몸 생각해서 적당히 마시고 밤늦도록 잔소리 말고 이웃을 생각해서 노래 부르지 말며 돈도 잘 벌지 못하면서 주변 사람에게 술을 사주는 버릇 좀 고치라는 것들이었다.한참을 말없이 어머니의 훈계성 잔소리를 듣고는 엉뚱하게 나한테 물었다.“내가 그랬냐?”나는 누구 편도 들을 수 없어서 얼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우리 아버지의 별칭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말수 적고, 좌우를 잘 건사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늘 웃는 낯이고, 술 잘 사주고, 집안일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남의 궂은일은 잘 도와주고….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닮지 말라고 했다. 나도 닮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이 들면서 은근히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아버지, 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바로 검사에게 그를 용서해야 우리 아버지가 편히 저승에 간다며 애절하게 탄원서를 보낸 제가 잘했다고, 아버지 뜻도 그러했노라 저를 칭찬하고 계실 걸 믿습니다.1947년 충남 공주 출생. 건국대 문학박사. 1975년 현대문학 ‘물살’ 등단. 제 15대, 16대 국회의원. 작가생활 30여 년 동안 장편소설 ‘인간시장’ ‘풍객’ ‘내륙풍’ ‘김홍신의 대발해’. 중국 고전 평역 ‘수호지’ ‘삼국지’ 등 100여 권을 출간했다.글 / 김홍신 소설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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