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력·품질 ‘으뜸’… 미탈, 인수 ‘군침’ 계속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쟁력이 높을수록 매력적인 적대적M&A(인수합병) 대상이 된다. 신일철도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금년 1월 2일 미무라 아키오(三村 明夫) 신일본제철(신인철) 사장은 도쿄 본사 간부 전원이 참석한 신년 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유럽 등지의 철강회사들을 잇달아 M&A해 세계 최대 철강회사로 부상한 아르셀로 미탈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실제 전 세계를 누비며 몸집을 불리고 있는 인도의 철강회사 미탈이 노리고 있는 다음 타깃은 아시아의 신일철이란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경쟁력을 감안하지 않고 일단 세계 각지의 철강회사들을 인수해 덩치만 키운 미탈이 앞으로 제대로 버티려면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선 신일철을 인수하는 게 최적이란 분석이다.그만큼 일본의 신일철은 철강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임을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신일철의 기술력은 무엇보다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일본 자동차가 증거다.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것은 신일철이 제공하는 고품질 자동차 강판과 특수강이 뒷받침 됐기 때문에 가능하다.최고급 자동차 강판인 ‘하이텐’(High Tensile Strength Steel Sheets)이 대표적 예다. 일본 자동차업체들은 자동차 충돌 때 안전성 강화와 경량화를 위해 하이텐이란 고강도 강판을 사용한다. 하이텐은 탄소를 포함하는 보통강에 니켈 실리콘 망간 등의 성분을 첨가해 강도를 높인 첨단 소재다. 이 하이텐이 일본 자동차 품질의 핵심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하이텐을 모두 신일철이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신일철은 1970년 야와다제철과 후지제철이 통합해 탄생했다. 통합 당시 철강 생산규모는 연간 4500만 톤이었다. 지금의 생산량 3100만 톤을 훨씬 웃도는 규모다. 당시 신일철의 탄생이 세계 철강업계에서 얼마나 큰 뉴스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신일철은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 이후 구조조정기를 거치는 동안 생산량이 연간 2320만 톤(1998년)까지 줄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성과 기술력은 계속 업그레이드돼 왔다.철강 제품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용 강판 제조기술만 봐도 그렇다. 신일철의 자동차용 강판 기술은 세계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올해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로 떠오른 도요타자동차의 경쟁력 바탕이기도 하다.신일철은 자동차 강판과 함께 고부가가치제품으로 일컬어지는 전기기계·기구용 전기강판 제조기술에서도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현재 80만 톤의 무방향성 전기강판을 생산해 세계 시장점유율 20%를 차지하고 있다. 또 방향성 전기강판의 경우 독자적인 ‘Hi-B’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다. 이 브랜드로 미국의 AK스틸, 중국의 무한강철, 독일의 TKS와 함께 Hi-B 패밀리를 형성해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신일철은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근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회계연도(2006년 4월~2007년 3월) 매출액이 4조3021억 엔(약 34조4000억 원)으로 전년대비 10.1% 증가했다. 전년도 15.3%에 이어 연속 두 자릿수 매출 증가를 기록한 것이다. 본업에서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를 보여주는 영업이익은 5801억 엔, 당기순이익은 3512억 엔으로 각각 0.7%와 2.1% 증가했다. 또 직원 1인당 순이익은 54.29엔으로 전년의 51.07엔에 비해 6.3% 신장했다.신일철의 기술경쟁력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역시 핵심은 장기적 안목의 연구 개발(R&D)투자다. 신일철은 지난 10년간 R&D에만 4000억 엔을 투자했다. 지난 10년(1996~2005년)간 당기순이익 합계(5845억 엔)의 70%에 달하는 액수다. 100원을 벌면 70원을 미래 투자에 사용한 셈이다. 눈앞의 이익만 보지 않고 기술경쟁력을 위해 장기적인 안목에서 투자를 해온 셈이다.미무라 사장은 “제대로 된 신제품 1개를 개발하는 데 평균 7년이 걸린다”며 “신일철은 첨단 신제품 개발에 기술과 자원을 집중해 왔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신일철이 획득한 국제특허는 1038건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사인 미탈(32건)의 300배를 넘는다.신일철의 기술력을 얘기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전후방 밀착형 공급망(Supply Chain)이다. 즉, 철강 공급자에서부터 2차 가공·유통·고객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으로 무장한 종합상사를 기반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고급강 수요기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우선 신일철은 원료조달에서 종합상사와 공동으로 글로벌 구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브라질의 CVRD, 호주의 BHP빌리톤 등 철광석 메이저들과도 원료 이용기술 공동개발 등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를 통해 신일철은 철광석 개발수입비중을 2005년 33%에서 2010년 50%까지 높일 계획이다.제조 및 2차 가공에서도 안정적 수요를 확보하고 있다. 신일철은 박판계열화에 이어 선재계열화를 추진하는 등 철강 2차 제품의 계열화를 통해 수요기반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해외에서도 자동차용 강판 중심의 글로벌 공급 네트워크를 구축했다.최종 고객 측면에선 확고한 고급강 판매기반을 갖고 있다. 자동차와 기계, 부품산업 등 일본의 수요산업은 세계 톱클래스다. 이런 수요업체와 안정적으로 거래함으로써 철강시황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고객사와 공동으로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게 신일철엔 큰 힘이다. 예컨대 일본이 세계 소형모터 시장의 80%를 점유함으로써 신일철이 고급 전기강판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동차용 강판의 경우 생산량 전체의 40%를 일본 자동차회사들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포스코 산하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신일철의 공급망은 일본 특유의 수직계열화 시스템을 반영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경쟁력과 수익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신일철의 미무라 사장은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세계 1위 미탈이 2위 업체인 유럽의 아르셀로를 인수하고 난 뒤 다음 인수 대상으로 신일철을 노리고 있어서다. 고급강 분야에 취약한 미탈이 일거에 고급기술을 획득하고, 아시아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일철을 인수하려 들 것이라는 게 세계 철강업계의 분석이다.미무라 사장은 올 초 일본 공영방송 NHK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다. 적대적 M&A에 휩쓸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실토했다. 그는 “신일철은 지금 거대한 자금력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다”고도 말했다. 엄청난 시가총액을 배경으로 주식교환을 통해 적대적 M&A 놀음을 하고 있는 미탈을 지칭한 것이다.세계 철강업계는 현재 생존을 건 M&A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시장의 부상으로 철강산업이 성숙산업에서 성장산업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통합화, 대형화 경쟁이 붙어 먹고 먹히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인도의 미탈이다. 지금은 신일철, 한국의 포스코, 중국의 바오산철강 등도 M&A 전의 소용돌이에 사실상 휘말려 있다. 전 세계를 훑고 온 미탈이 이제 아시아 철강회사로 눈길을 돌리고 있어서다.김주한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철강업의 전방산업인 철광석업계는 상위 3개 사가 시장의 79%, 대표적 후방산업인 자동차업계는 상위 6개 사가 76%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에 철강업계는 세계 빅5의 시장점유율이 20%에 그친다”며 “철강업계의 M&A는 당분간 더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신일철은 그 M&A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신일철은 미탈의 적대적 M&A 방어를 위해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 중이다. 우선 한국의 포스코 등과 결속을 강화해 미탈에 대한 방어전선을 쳤다. 신일철과 포스코가 지난 3월 상호 보유지분을 3% 수준에서 5%로 늘린 게 그런 맥락이다. 당시 신일철은 포스코의 주식 436만 주(1.68%)를 사들여 보유지분을 5%로 늘렸다. 포스코도 역시 신일철의 지분을 5%로 확대했다. 세계 2위(신일철)와 4위(포스코)가 손잡고 세계 1위 미탈의 공격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신일철은 또 포스코와 금년부터 공동으로 철광석 구매 협상에도 나서는 등 전략적 제휴를 강화키로 했다. 세계 철광석 시장에서 구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포석이다. 두 회사는 철광석 수급 상황에 대한 공동 시장조사를 실시하고, 철광석 공급회사와 관련국 정부기관의 승인을 얻어 가격 협상도 함께 할 예정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상호 지분 확대 등으로 신일철과 포스코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며 “두 회사는 철강 원료 상호교환과 부산물 재활용 공동 프로젝트까지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신일철은 개인주주 대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유럽의 아르셀로가 미탈에 인수당한 것도 결국 개인주주들이 헤지펀드에 주식을 팔고, 그것이 다시 미탈로 넘어갔기 때문이란 게 신일철의 분석이다. 신일철의 현재 개인주주 비중은 약 24%다. 금융기관(38%) 외국인(19.7%) 일반 기업(12.5%)과 비교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막상 M&A가 시도되면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신일철은 올 초 40만여 명의 개인주주를 대상으로 사상 처음으로 의식조사를 실시하고 제철소 초청 설명회도 열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서 개인주주들이 우호세력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다.신일철이 적대적 M&A에 대비해 방어만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니다. ‘공격이 최선’이란 말이 있듯이 적극적인 공세도 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미국과 유럽시장의 교두보로서, 세계 최대 철광석 산지인 브라질에 제철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 브라질에 연간 3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짓는 데 신일철은 최근 인력과 기술을 전력 투입하고 있다. 제철기술을 해외로 유출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깨고 외국에 첫 제철소 건설에 나선 것이다. 적극적 시장공략을 통한 미탈 대응전략으로 볼 수 있다.신일철은 또 최고 수준의 기술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 최고 품질의 제품이야 말로 신일철의 존재 이유이자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신일철은 이를 위해 2007~08 회계연도에 총 8500억 엔을 R&D 등에 투자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당초 투자계획보다 3000억 엔을 더 늘린 것이다.이 같은 적극적인 투자로 신일철의 경쟁력을 더욱 높인다는 구상이다. 신일철이 투자 자금을 늘리기로 함에 따라 지난 2006~08 회계연도의 3년간 총 투자액은 1조2500억 엔에 달하게 됐다. 3년 동안 투자액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1조 엔을 돌파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2003~05 회계연도엔 6350억 엔을 투자했었다.취재= 차병석 한국경제 도쿄특파원 협찬=POSCO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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