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신 9단’ 권 부총리의 말솜씨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다녀온 권오규 부총리가 방미 기간 동안 활발한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외교’를 펼쳤다. 미국 정관계 유력 인사들을 잇달아 만나 “한·미 FTA를 서둘러 비준하는 것이 미국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라는 압박성(?)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FTA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라도 한국과의 FTA를 ‘불쏘시개’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였다.지난 23일에는 막스 바커스 미국 상원 재무위 위원장, 찰스 그래슬리 상원 재무위 간사, 찰스 랑겔 하원 세입위 위원장, 수전 슈워브 무역대표부 대표 등 의회와 행정부에서 힘깨나 쓴다는 핵심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권 부총리는 FTA 비준 문제를 화제로 삼으려 애썼다. 하지만 답변으로 돌아온 건 역시 ‘쇠고기’와 ‘자동차’였다. 미국 측 인사들은 뼈 있는 쇠고기를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완전 허용을 FTA 비준과 결부하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권 부총리는 이에 대해 “현재 검역 중단 상태인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 미국산 쇠갈비 수입 허용 문제는 과학적인 절차에 따라 선의를 가지고 합리적인 기간 안에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자동차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이 제기한 비관세 장벽은 FTA를 통해 모두 해소됐다”며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언제라도 한국에서 자동차를 팔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미국은 줄곧 쇠고기 이슈를 어떻게든 FTA 비준의 선결 조건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지난 16일 한국을 찾은 웬디 커틀러 한·미 FTA 미국 측 수석대표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한·미 FTA 민간대책위원회 공동으로 연 오찬 간담회 자리에서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해야 양국 간 FTA 협정이 미국 의회에서 빨리 승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이런 이유로 권 부총리가 미국에 가서 FTA 비준을 촉구하면 쇠고기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건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미국에 공세에 대해 권 부총리는 언제라고 시기를 못 박지 않으면서도 과학, 선의, 합리적인 기간 등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기 나름인 어휘를 총동원해 응수했다.쇠고기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을 미리 준비해 갔다는 얘기다. 미국 측에 한·미 의회가 FTA를 비준(한국은 비준 동의)하는데 쇠고기 수입 문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면서도 정부가 미국 쇠고기 문제에 ‘저자세’라는 국내의 따가운 여론 또한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미국 하원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올해 안으로 쇠고기 수입을 완전 허용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며 “FTA 비준 문제를 잘 풀어보려다가 섣불리 쇠고기를 수용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간 ‘벌집’을 건드리는 결과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실제 권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시비 붙는 이가 없었다. “미국산 쇠고기에서 현저한 위험이 확인됐다는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임상규 농림부 장관과는 대조적이다. 과천 관가에서는 이를 두고 “역시 ‘처신 9단’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기업인들의 ‘규제 완화’ 요구를 적절히 들어주면서도 청와대 코드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처신한 평소 실력이 나왔다는 얘기다.반면 농림부는 쇠고기 문제를 놓고 쏟아지는 국회 시민단체 언론 등 각계의 공격을 ‘홀로’ 받아내고 있다. 수세에 몰리다 못해 지켜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정도다. 임 장관이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따질 것은 따지고 국민의 건강과 축산 농가의 어려움을 반영해 국익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여론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다.이 때문에 농림부 일각에서는 “어차피 욕은 우리가 먹게 돼 있다”는 체념마저 들린다. 앞에는 수입 조건을 국제 기준에 맞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압박하는 미국이 버티고 있고 한 발짝이라도 물러설라치면 ‘협상 똑바로 하라’는 여론이 등 뒤에서 들끓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얘기다. 농림부 관계자는 “농정의 주무 부처라는 책임을 어차피 지고 가야 하겠지만 쇠고기 문제만큼은 건너뛰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차기현·한국경제 기자 kh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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