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서 투자확대, 합종연횡으로 삼성 협공
‘쫓기는 한국, 쫓는 일본.’최근 세계 반도체 업계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멀찌감치 앞서 달리던 한국을 일본이 바짝 추격하면서 한국은 어느새 쫓기는 상황이 됐다.삼성전자로 대표되는 한국의 반도체는 1990년대 벌어진 세계 반도체 전쟁에서 공격 투자에 성공, 세계 선두에 나섰다. 2000년대 들어 미국발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자 NEC 후지쓰 등 일본 업체들은 메모리 분야에서 손을 뗐지만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 결과 세계 반도체 시장은 한국의 삼성전자 하이닉스와 독일의 인피니온,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일본 엘피다 등으로 재편된 상태다.그러나 최근 삼성전자 등이 방심한 사이 전황은 급변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전력을 재정비한 일본 대만 미국 등의 경쟁 업체들이 공격 투자와 합종연횡을 통해 삼성전자를 협공하고 있다. ‘타도 삼성’의 최전선에는 일본 기업들이 앞장서 있다.일본의 반도체 업체인 도시바는 10월 8일 업계 처음으로 오는 2009년 회로선폭 30나노(10억분의 1)의 차차세대 플래시메모리 양산 체제를 갖춘다고 발표했다. 그 경우 플래시메모리 분야 세계 1위인 삼성전자보다 기술면에서 앞선다는 부연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도시바는 앞으로 3년간 1조 엔(약 8조 원) 이상을 투자해 현재 56나노급 메모리 반도체 생산 체제를 단계적으로 향상시켜 2년 후엔 30나노급의 차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년 12월 본격 가동 예정인 미에현 욧카이치시의 새 공장에선 내년 3월부터 43나노급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할 예정이라고 한다.도시바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로 휴대전화 등의 데이터 보관용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플래시메모리 생산에 주력할 방침이다. 현재 세계 플래시메모리 시장은 한국의 삼성이 시장점유율 45.4%로 1위, 도시바는 26.1%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두 회사가 전 세계 플래시메모리 시장의 4분의 3을 점유하고 있는 셈이다.삼성전자의 경우 현재 도시바 보다 다소 앞선 52나노급 기술로 플래시메모리를 생산 중이다. 그러나 도시바가 내년 43나노, 2009년 30나노급 플래시메모리를 양산하면 삼성을 기술적으로 앞지르게 된다는 게 도시바의 설명이다.회로선폭을 더 좁히는 기술을 갖는다는 것은 똑같은 크기의 웨이퍼(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원판)로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생산비용을 줄여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게 된다. 도시바는 30나노급 미세 가공 기술을 사용해 반도체를 생산하면 지금보다 생산비용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문제는 도시바의 이번 발표가 개발된 기술이 아니라 앞으로 개발 예정인 기술에 초점 맞춰졌다는 점이다. 도시바가 아직 개발되지도 않은 기술을 서둘러 발표한 데 대해 업계에선 삼성 견제용이란 해석이 나오고 있다.매년 10월께 나오는 이른바 삼성전자의 ‘황의 법칙’ 발표를 앞두고 물 타기를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삼성전자의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은 지난 2000년 디지털기기와 디지털가전의 확산으로 메모리 반도체 집적도가 매년 2배씩 커진다는 소위 ‘황의 법칙’을 발표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2004년 세계 최초로 60나노 8기가 낸드플래시를 선보인데 이어 2005년 50나노 16기가, 2006년 40나노 32기가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하는 등 메모리 집적도를 실제 매년 2배씩 키워 왔다. 이 속도라면 삼성전자는 10월 중 30나노 64기가 플래시메모리 개발 소식을 알릴 차례였다.이런 상황에서 도시바가 아직 개발 완료하지도 않은 30나노 낸드플래시를 2009년부터 생산해 삼성전자를 따라잡는다고 밝힌 것은 다분히 ‘황의 법칙’에 대한 물타기 용 언론 플레이란 지적이다.그렇다고 도시바가 실체도 없는 언론 플레이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삼성전자를 따라잡기 위한 준비도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도시바는 지난 9월 초 미에현 욧카이치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완공해 본격 가동을 준비 중이다.총 6000억 엔을 투자한 이 공장에선 낸드형 플래시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생산 능력은 300mm 웨이퍼 환산 기준 월 21만 장이다. 도시바의 기존 3개 공장 생산 능력을 합친 월 20만 장보다 많다. 도시바는 이 공장을 낸드형 플래시메모리 부문에서 삼성전자를 추월해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일본 기업들은 다른 나라 기업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삼성전자를 협공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의 소니가 독일의 인피니온과 반도체 사업에서 손잡은 게 대표적이다. 소니는 인피니온 계열의 키몬다와 합작해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에 쓰이는 D램을 공동 생산할 계획이다. 두 회사가 50 대 50 지분으로 합작회사를 만든 뒤 소니는 D램을 설계하고, 유럽 2위 반도체 메이커인 키몬다는 생산해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소니는 삼성에 대한 D램 의존도를 낮추고 키몬다는 시장점유율과 원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산이다.일본의 엘피다도 개인용컴퓨터(PC)용 D램 생산에서 삼성을 추월하기 위해 대만의 파워칩과 연대했다. 두 회사는 내년 1분기부터 65나노 공정으로 D램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들 회사가 초미세 공정인 65나노 양산을 본격화하면 삼성전자에 버금가는 생산성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의 파워칩 황충런(黃崇仁) 사장은 “삼성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라고 공언했다. 도시바 경영진도 “삼성을 넘어서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이 같은 합종연횡은 일본의 기술력과 대만 독일의 생산 능력이 결합돼 삼성전자를 포위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일본과 대만 업체들은 출혈경쟁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달부터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현물 가격이 다시 하락세로 돌아선 데 이어 최근엔 고정 거래 가격마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격이 떨어지는 데도 일본과 대만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와 사활을 걸고 한판 붙어 보겠다는 자세다.일본 기업들이 삼성을 추격하고 있는 것은 반도체만이 아니다. 한때 삼성에 패했던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반격을 시작했다. 디스플레이의 반격은 소니가 주도하고 있다.소니는 10월 2일 업계 처음으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텔레비전을 오는 12월부터 시판한다고 발표했다. OLED 패널은 해상도가 기존 LCD나 PDP보다 뛰어나다. 특히 전력 소비가 적어 차세대 디스플레로 주목 받고 있다. 아직 대형화가 쉽지 않고 제조 원가가 높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 전자 업체들이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는 분야다.지금까지 앞선 원천 기술로 상용화를 주도해 온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 등 한국 업체들은 소니의 첫 양산 발표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소니는 최근 자회사인 소니파이낸셜을 상장해 3000억 엔의 ‘실탄’도 확보했다. 소니는 이 돈을 대부분 OLED-TV 상품화에 투입할 계획이다.소니는 브라운관 TV를 고집하다 뒤늦게 삼성전자로부터 LCD 패널을 공급받는 ‘굴욕’을 감수하며 평판 TV 시장에 뛰어든 회사다. 소니의 주바치 료지 사장은 “차세대 TV를 부활의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삼성전자는 그동안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점해 막대한 이익을 축적한 뒤 후발업체들이 따라올 때쯤 대량 생산으로 값을 떨어뜨리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이런 전략이 먹혀들면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순환 구조’가 흔들릴 조짐이다. 일본 업체 등 후발 기업들이 기술면에서 삼성을 바짝 뒤쫓고 있기 때문이다.삼성전자가 일본 기업들의 집요한 추격을 어떻게 따돌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