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가라’… 다양한 사례 중심 강의

협상스쿨 체험기 - 하버드대 협상스쿨

지난 2006년 가을, 세계적인 협상 교육과정을 조사하면서 하버드 스탠퍼드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듀크 카라스(Karras) 등 다양한 프로그램 중 가장 역사가 깊고 명성이 높은 하버드대의 ‘PON(Program on Negotiation)’ 교육과정을 선택하게 됐다. 10여 개의 협상 교육과정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기업체 임직원 대상의 협상 기본과정과 협상학의 거두인 윌리엄 유리 교수가 진행하는 고급 협상 교육과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프로그램이 이름만 그럴싸하고 내용이 부실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20시간 이상 이동해야 갈 수 있는 곳인데…. 하지만 교육과정이 끝난 지금, 내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보스턴에서의 3일간 교육 일정을 정리한다.첫째 날. 아침 8시 30분 프로그램 등록을 하고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어떤 연회장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아주 활기찬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15년 전 대학에서 느꼈던 그런 생동감이 어디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체험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300여 명. 원탁 테이블 50여 개에 6명씩 배정되고 진행을 도와주는 스태프만 10여 명. 단순한 단기 교육과정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에서부터 놀라웠다.강의실 입구에서 등록을 마치고 자리를 배정받은 후 다른 교육생들과 인사를 반갑게 하는데, 멀리서부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협상을 배우기 위해 모인 것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는 유치원 교사였고 전형적인 미국 동부의 백인 아저씨는 시카고의 경찰관이었으며 어떤 흑인 아가씨는 보험 영업사원이었다. 환갑을 넘긴 멋진 백인 아저씨는 정년퇴직한 지방 공무원이었으며 중국인 2세인 중국 식당 사장도 있었다.협상교육 과정이 개설된 지 벌써 20여 년이 흐르면서 이제 미국에서는 직업이나 나이, 전공에 불문하고 누구나 공부해야 하는 필수과정으로 자리 잡은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협상교육이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로서는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교육이 진행되는 3일 내내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듣고 발표하고 협상하는 다양한 교육생들의 모습을 보며 국내에서 협상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큰 책임감을 갖게 됐다. 더욱 좋은 강의를 해야 하고 더욱 실속 있는 교육과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교육 일정에 맞춰 하버드 로스쿨의 로버트 보돈 교수가 담당하는 ‘Setting the Stage for Productive Negotiation’이라는 첫 강의가 시작됐다. 첫 강의인 만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해 주고 1시간 정도의 모의 협상도 진행했다. 200명이 넘는 학생 중 비영어권에서 참가한 유일한 교육생인 나로서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 그들과 진행하는 모의 협상이 또 하나의 도전이었고 색다른 희열이었다.점심시간에는 또 다른 교육생들과 만나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영업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직원 관리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협력회사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교육에 참가했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라고 얘기했다.식사가 끝난 후 잠깐 동안의 휴식시간 동안에도 교재를 들여다보며 배운 것을 정리하고 다음 시간 교재를 미리 읽어 보는 등 너무나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교육생 대부분이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비싼 교육비(약 3000달러이며 대부분 자비로 참가함)를 내고 참가해서인지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자세가 교육의 뜨거운 열기를 만드는 것 같았다.둘째 날 오후에는 두 번째 과정인 ‘Deal-ing with Difficult People and Difficult Situation’이 시작됐다. 이번 과정 전체는 세계적인 협상의 명저인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의 저자인 윌리엄 유리 교수가 단독으로 진행했다. 뒷머리가 벗겨진 것 말고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인 유리 교수는 주로 강의와 질의응답으로만 진행했다. 많은 학생들이 이미 유리 교수의 명성을 알고 있어서인지 더욱 진지하게 참여하고 많은 질문과 답변이 계속됐다.첫 강의가 끝나고 유리 교수에게 다가가서 몇 가지 얘기를 나눴다. 내가 협상을 알게 된 첫 교재가 유리 교수의 저서였다는 것에서부터 언제 기회가 나면 한국에서 강연을 한 번 듣고 싶다는 얘기까지 다양한 얘기를 나누며 교수의 휴식 시간까지 다 뺏고 말았지만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e메일 등을 통해 계속 연락하기로 약속했다.셋째 날. 이틀째 계속된 유리 교수의 협상 강의는 주로 경험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진행됐다. 틀에 짜여 있는 이론 강의보다는 협상 명저의 저자로서, 협상이론의 개발자로서, 세계적인 협상 컨설턴트로서 자신의 다양한 협상 경험을 공유하고 많은 교육생들의 질문과 지적 호기심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개인적으로는 까다로운 상황에서의 협상법이라는 이론에는 다소 이견을 가지고 있지만 해박한 지식과 경험으로 설명하는 구체적인 사례에서는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강의는 주로 상대의 잘못된 협상의 기술과 기만 전술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를 듣고 한 차례의 모의 협상을 경험하면서 3일간의 협상교육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3일 동안 2개의 협상 전문 과정을 이수한 작은 경험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시간이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고의 ‘협상 강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간호사, 유치원 교사, 중국집 사장, 경찰관 등 어찌 보면 협상과 관계없는 직업을 가진 일반인들까지도 저렇듯 협상을 배우려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강의실을 가득 채운 300여 명의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교육생들을 보며 협상 강국 미국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재욱·IGM 협상스쿨 교육총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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