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 왕국' 신화는 계속되나

지난 1961년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은 새로 개발한 자양강장제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박카스’란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독일 유학 시절 함부르크 시청 지하 홀에서 본 박카스 석고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이때만 해도 박카스가 40년 이상 인기를 누리며 국내 역사상 최다 판매 상품이 되리라고는 강 회장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박카스는 뒤끝이 없는 상쾌한 맛으로 소비자의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1966년 연간 판매량이 1000만 병을 넘어섰고 1976년 1억 병을 돌파했다. 한국인들의 박카스 사랑은 유별나다. 그동안 수많은 드링크 제품이 도전장을 던졌지만 하나같이 박카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강 회장은 박카스의 성공으로 부친인 강중희 전 회장이 1932년 창업한 동아제약을 국내 최대 제약회사로 키워냈다.1989년 ‘맹물 박카스’ 논란이 빚어지면서 한때 성장세가 주춤한 적도 있다. 단맛을 내기 위해 첨가하는 인공 감미료 사카린이 발암물질로 판명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게 발단이었다. 하지만 곧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993년 의약품 광고 금지가 전면 해제되면서 동아제약의 대량 광고 전략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묵묵히 음지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을 담은 유명한 ‘새 한국인’ 광고 시리즈가 이때 시작됐다. 새로운 소비 시장인 젊은 층 공략에 성공하면서 1990년대 후반 박카스 판매량은 이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했다.하지만 2001년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끝없이 증가할 것처럼 보이던 박카스 매출은 2001년을 정점으로 놀랍게도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락 속도는 상승 속도를 앞질렀다. 가장 큰 원인은 2000년 시작된 의약 분업이다. 약국들은 박카스 판매보다 처방전 조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약국 위치도 1층 길가에서 병의원이 있는 2층, 3층으로 대거 이동했다. 때마침 광동제약 ‘비타500’이 출시돼 돌풍을 일으켰다. 박카스는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돼 약국에서만 팔 수 있지만 비타500은 ‘식품(혼합음료)’이라 일반 슈퍼에서도 자유롭게 팔았다. 유통망에서 경쟁이 되지 않았다.의약 분업은 의약품 시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시장의 중심축은 약국에서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에서 처방전 중심의 전문의약품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박카스 신화의 ‘단맛’은 오히려 ‘독’이 됐다. 그동안 지나치게 박카스에 의존하는 경영을 펴 온 것이다. 웬만한 어려움은 박카스 가격을 올리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전문의약품 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40%가 넘는 박카스 매출 비중은 어느새 동아제약의 발목을 잡는 ‘부담’으로 돌변했다.2003년은 동아제약의 75년 역사에서 가장 힘겨웠던 시기에 해당한다. 매출액 4924억 원으로 1989년 이후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박카스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큰 충격과 함께 경영 책임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졌다. 최근 재연되고 있는 경영권 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강 회장의 2남으로 1997년부터 대표이사 부사장과 대표이사 사장을 차례로 맡았던 강문석 당시 사장(현 동아제약 이사)은 2004년 말 사실상 경영에서 물러나야 했다.박카스 매출은 지금도 계속 줄고 있지만, 동아제약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대형 신약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박카스 회사’에서 ‘전문의약품 전문 제약사’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동아제약이 2003년 출시한 위염 치료제 ‘스티렌’은 지금까지 개발된 국내 신약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동아제약은 지난해 스티렌으로 445억 원을 벌어들였고 올해에는 600억 원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2005년 말 내놓은 발기부전 치료제 ‘자이데나’ 역시 지난해 100억 원어치가 팔려나갔다. 동아제약이 2004년 이후 빠르게 성장세를 회복한 것은 바로 이들 신약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다.향후 제약 업계의 미래는 신약 개발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개발 열기에 비해 실제적인 성과는 아직 미미한 편이다. 현재까지 나온 15종의 국내 신약 가운데 연매출 100억 원 이상인 ‘블록버스터’ 신약은 3~4종에 불과하다. 그중 2개가 동아제약의 신약이다. 동아제약의 신약 개발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최근 동아제약 경영권 분쟁의 당사자인 현 경영진과 강문석 이사 측은 2000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장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향한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국내에서 동아제약만큼 확실하게 신약 개발 능력을 갖춘 제약사는 드물다”며 “계속된 경영권 분쟁이 자칫 펀더멘털 훼손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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