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옛날이여’…기축통화 위상도 ‘흔들’

미국채에 들어온 외국돈 빠지면 최악… 한국도 ‘강 건너 불’ 아니야

미국 달러화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유로화 등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는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캐나다 달러화에 대한 가치마저 역전됐다. 이런 식이라면 지난 30년간 글로벌 경제를 지탱하던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달러가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이라는 경제 체제도 무너질 것이란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달러화 약세가 끼치는 영향은 크다. 당장 원자재 값이 폭등하고 있다. 달러화를 믿지 못하면서 달러화 자산을 팔아치우고 실물 자산으로 돈이 옮겨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달러화로 표시되는 유가도 영향을 받고 있다. 산유국으로선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구매력이 감소한다. 유가를 올릴 수밖에 없다.원자재 값과 유가 상승은 글로벌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생산 원가도 비싸진다.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올리게 되고 아무래도 경제는 빡빡해지는 게 불가피하다. 더욱 큰 문제는 미국 경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휘청거리는 미국 경제는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미 국채에 들어와 있던 각국 중앙은행들의 돈이 빠져나가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그러나 반드시 부정적 영향만 있는 건 아니다. 크게는 세계 경제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수입이 줄어들면 미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이 당장은 힘들다. 그렇지만 살아남기 위해 내수 시장 개척에 나설 수밖에 없어 미국 이외의 경제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품 경쟁력도 살아날 수 있다.미국도 마찬가지다. 소비 위축으로 내수가 타격을 받는 건 불문가지다. 그렇지만 수출이 늘어난다. 수출이 늘어나면 경상 적자가 줄어들고 경제는 그만큼 내실을 다질 수 있다.문제는 달러화의 하락 속도다. 속도가 지금처럼 가파를 경우 부정적 효과가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점진적인 하락을 이룰 경우 긍정적인 효과도 나타나게 된다. 달러화 약세는 원화 강세의 다른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강(强)달러 정책’을 유지해 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달러화 가치가 흘러내리는 걸 용인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달러화를 보유하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미국으로선 막대한 재정 적자를 국채를 발행해 막을 수 있었다. 안전한 달러화 자산인 미 국채를 사려는 외국 중앙은행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문제가 된 건 재정 적자와 함께 경상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진 탓이다. 쌍둥이 적자는 무언가 돌파구를 요구했고, 결국 미 정부는 달러 약세를 용인하기 시작했다.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문제는 서브프라임 파문이 불거지면서 커졌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 9월 18일 기준 금리인 연방기금 목표 금리를 0.5%포인트 떨어뜨렸다. 달러 약세와 인플레이션 압력이 우려됐지만 침체(recession) 기미가 역력한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약발’은 의외로 빨리 나타났다. 달러화가 줄줄이 흘러내린 것. 시장 참가자들은 미국이 추가로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달러화 자산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달러화 자산에 대한 메리트가 떨어지면서 빨리 발을 뺄수록 유리하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됐다.이는 투매로 연결됐다. 유로화에 대해 달러화 가치는 연일 사상 최저치로 하락했다. 캐나다 달러화에 대해선 오히려 가치가 역전됐다. 달러화 자산에서 빠져나온 글로벌 자금은 안전자산인 금(金)을 비롯한 원자재와 비달러화 자산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이로 인해 원자재 값은 급등했다.이러다 보니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위상은 형편없게 됐다. 달러화는 지난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가 도입된 이후 전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달러화 가치가 더욱 하락할 경우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로화에 내줄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이미 전 세계 외환 보유액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3월 말 현재 64.2%로 축소됐다. 반면 유로화 비중은 작년 말 25.9%에서 26.1%로 높아졌다. 더욱이 그동안 ‘달러화 페그제’를 유지해 오던 국가들도 잇따라 페그제를 포기하고 있다. 지난 5월과 6월 쿠웨이트와 시리아가 달러 페그제를 폐지한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마저 조만간 달러 페그제를 폐지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이뿐만 아니다. 달러화는 원유 시장에서의 기축통화 역할도 흔들리고 있다. 서부텍사스산 중질유(WTI), 두바이유, 브렌트유 등 3대 원유의 가격은 달러로 매겨진다. 따라서 달러화가 하락하다 보니 유가가 보합을 유지하더라도 산유국들의 구매력은 줄어든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유가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최근 유가가 강세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최근 같은 속도로 달러화가 흘러내릴 경우 글로벌 경제는 타격을 받게 된다. 당장 세계 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미국이 문제다. 달러화 자산을 팔자는 경향이 심해지면 금융시장이 혼란을 겪는다. 미 국채를 한꺼번에 팔아치우려고 나설 경우 달러화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수입 물가는 치솟고, 이는 당연히 소비 감소로 이어진다. 소비가 미국 경제 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 경제도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미 경제가 죽으면 글로벌 경제도 얼어붙는다. 당장 미국에 대한 수출이 문제다. 독일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은 지난 5년간 달러 약세 때문에 북미 시장에서 35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공개했다. 폭스바겐은 환율 비용을 줄이기 위해 20년 만에 미국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다. 수출 경쟁력이 약해진 기업들이 당장 생산 원가를 줄이기는 힘들다. 이는 곧 해당 국가의 경제 성장 저하로 연결된다.유가 등 원자재 값 상승도 부담이다. 지금처럼 원자재 값이 고공행진을 하게 되면 생산 원가가 뛰어 오른다. 수출 경쟁력마저 약화된 마당에 생산 원가마저 오르면 남는 게 없다. 이런 악순환이 몇 번만 되더라도 세계 경제는 ‘약달러 동반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그렇다고 부정적인 영향만 있는 건 아니다. 달러화 폭락 사태가 진정되고 점진적인 약세를 보일 경우 긍정적인 효과도 상당하다. 글로벌적으론 세계 경제의 불균형 해소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미국에 대한 수출이 줄어들면 아시아와 유럽은 다른 시장을 찾게 된다. 다른 시장을 개척할 수도 있고 내수 시장을 확대할 수도 있다. 특히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국가들의 성장세는 눈부시다. 이들이 당장 미국의 소비 시장을 대체할만한 시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소비 시장은 커질 게 분명하다. 달러 약세가 점진적으로 이뤄질 경우 미국 시장을 두고 각축을 벌였던 글로벌 기업들은 이머징 마켓이라는 황금어장으로 결투 무대를 옮겨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글로벌 경제의 지나친 미국 의존도가 어느 정도 해소된다. 결국 부의 배분 효과가 나타나면서 세계 경제의 불균형이 해소되는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미국 경제도 마찬가지다. 당장 수출이 늘어난다. 실제 지난 7월 미국의 수출액은 1376억8000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2분기 경제 성장률 3.8% 중 수출이 1.32%포인트를 기여해 소비의 성장 기여율인 1.0%포인트를 오히려 앞섰다. 달러 약세 기조가 이어진다면 경상 적자도 크게 해소될 게 분명하다. 미국의 경상 적자는 지난 2005년 말 국내총생산(GDP)의 6.8%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지난 2분기 경상 적자는 5.5%에 그쳤다.이 같은 현상을 반영, ‘미국 경제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GE의 올 해외 매출액은 미국 내 매출액을 넘어설 전망이다. GE의 해외 부문 최고경영자(CEO)인 페르디난도 베칼리팔코는 “경제 둔화로 GE의 미국 내 매출은 감소가 불가피하지만 해외 시장의 선전으로 이를 상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기업의 해외 이익 비중은 지난 1960년대에 5%에 불과했으나 올 들어선 25%로 증가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 1분기에도 미국 기업들의 해외 이익은 전년 동기보다 16.4%증가해 내수 이익 증가율(2.7%)을 훨씬 앞질렀다.중요한 건 역시 달러화 약세 속도다. 속도가 어떠냐에 따라 부정적 효과와 긍정적 효과 중 어느 것이 커질 수 있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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