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조업의 힘은 모노즈쿠리’

후지모토 다카히로 도쿄대 경제학연구과 교수

전 세계 제조업의 롤모델이 되고 있는 일본 도요타자동차 생산 현장의 비결은 무엇일까. 일본 제조업은 왜 강한 것일까. 후지모토 다카히로(藤本隆宏) 도쿄대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교수는 이를 일본 제조업의 혼(魂)이라고 할 수 있는 모노즈쿠리 이론에서 찾고 있다.아직까지 국내에는 생소한 개념인 모노즈쿠리(もの造り)는 일본어로 ‘물건 만들기’라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어로 매뉴팩처링(manufacturing)으로 번역하다가 최근에는 보통명사로 그냥 모노즈쿠리로 표기하고 있다. 후지모토 교수의 이론을 통해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된 것이다.일본 제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통합형(인테그럴형) 산업’과 ‘조합형(모듈형)’ 산업‘이라는 특성을 알아야 한다. 원래 이것은 미국 MIT, 하버드대, 펜실베이니아대의 연구진이 1990년대부터 제창한 구분법이다.통합형 산업이란 하나의 부품이 여러 가지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제품 분야를 말한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완성된 차량은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엔진의 중심이 차체의 어느 부분에 있는가’, ‘엔진의 성능과 차체의 중량이 얼마나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등 부품 설계의 상호 관계가 미묘하게 달라짐에 따라 그 제품의 전체 성능이 크게 바뀐다.반면 컴퓨터의 모니터나 하드디스크처럼 각각의 부품들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고, 각 부품이 서로 표준화된 인터페이스를 통해 연결만 되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조합형 산업이라고 한다.미국의 경우 부품의 통합이나 상호 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산 시스템이나 제품을 고안하는 것이 제조업의 기본 정신이다. 업계 표준을 만드는 능력,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능력, 비즈니스 모델을 기획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반면 일본 기업들의 장기인 통합형 산업은 각 부품들이 전체 시스템을 위해 잘 조화돼야 하지만, 명확하게 수식화하거나 모델링화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고 단숨에 완성품을 만들어 내기가 힘들다.이를 위해서는 여러 제품의 공정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다기능공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반복된 제품 제작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대응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 속에서 기능을 기술로 승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모노즈쿠리라고 부른다. 본부 조직의 기획이 아래로 전달되는 방식의 미국식 경영 이론에 익숙한 한국의 기업들에 모노즈쿠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최근 하루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지모토 교수는 먼저 자신이 모노즈쿠리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줬다. 도쿄대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교수와 모노즈쿠리 경영센터장을 맡고 있는 후지모토 교수는 ‘연(緣)’이라는 말을 들려줬다. 지금에까지 온 것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결과라는 것이다. 후지모토 교수가 열네 살이던 때 작고한 아버지는 1920년대 일본에서 카레이서로 활약했었다. 훗날 후지모토 교수가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모노즈쿠리 이론을 연구한 것은 대대로 이어온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도쿄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이론보다는 현장과 실무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다. 그러나 이름 없는 대학생에게 생산 현장을 보여줄 회사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농업 현장이었다. “공짜로 보여주는 곳은 그곳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논이나 밭에 물을 대는 전통적인 모노즈쿠리 현장을 봤던 것이다.대학원 졸업 후 미쓰비시종합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해 지역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중 회사로부터 생산 현장에 대한 연구를 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5년의 회사원 생활을 뒤로하고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박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자동차 전문가인 아바나시 교수를 만나 자동차 산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여러 가지 과정이 ‘연’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후지모토 교수의 말이다.“제가 기술자는 아니지만 기술자들의 말을 이해하고 이를 경영학자, 경영진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공업적인 설계에는 경제학이 도입되지 않았고, 경영학에는 생산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후지모토 교수가 모노즈쿠리 이론에 착안한 것은 그가 생산 현장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영학은 미국의 경영학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모노즈쿠리는 공학부에서 많이 다루는 개념이었다.“모노즈쿠리는 제가 창안한 용어는 아닙니다. 예전부터 개발 관리, 기술 관리라는 뜻으로 쓰이던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모노즈쿠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처음에는 생산 현장에서의 물건 만들기가 모노즈쿠리라고 생각했는데, 개발 생산 판매 물류, 이 모든 것에 다 적용될 수 있더군요. 넓게는 경영 활동 전반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 경제를 위해서는 모노즈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도쿄대 모노즈쿠리 경영센터장을 맡고 있는 후지모토 교수는 일본을 대표하는 17개 기업을 대상으로 혁신 경영 이론을 전파하고 있다. 도요타 혼다 캐논 닛산 마쓰시타 엡손 소니 아사히 미쓰비시 등이 그가 언급한 17개 기업에 속해 있다. 이들 회사의 업무 교본을 만드는 데 컨설팅을 하는 것도 연구소의 몫이다.또 기업의 간부급 사원들을 대상으로 ‘모노즈쿠리 디렉터’ 양성 스쿨을 진행하고 있다. 3개월 과정으로 매주 금·토요일에 수업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다니는 공장은 잘 알지만, 다른 회사의 공장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기 때문에 세대와 회사를 뛰어넘는 지식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어느새 모노즈쿠리 전도사가 되어버린 그가 한국의 경영자들에게 노하우를 전파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생산 방식을 쓰든지 현장발 사고방식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경영자는 자기 회사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아야 하고 이때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현장 인력의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또 농업, 공업, 서비스업의 1, 2, 3차 산업에 두루 통용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제한도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당연히 모노즈쿠리 이론을 적용할 곳이 많을 겁니다.”끝으로, 혹시 직접 경영을 해볼 생각은 없는지 물어봤다. “학자가 경영을 하면 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영을 한다는 것은 생산 현장 외에도 챙기고 판단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쉬운 자리가 아니지요. 지금처럼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연구하는 것에 만족합니다.”약력: 1955년생. 도쿄대 경제학과 졸업. 미쓰비시 종합연구소 입사.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박사과정 졸업. 96년 하버드대 객원교수. 98년 도쿄대 경제학연구과 교수(현). 2004년 도쿄대 모노즈쿠리경영센터장(현).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