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을 하려면 나를 먼저 잘라라’

감원 '제로'경영으로 세계적인 방청유 압연유업체 일궈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 서울 양재동 범우화학 사무실. 주요 간부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관리담당 임원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국내외 경영 여건이 너무 나쁩니다. 우리도 20명 정도를 구조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이날 회의는 전 직원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였다. 외환위기 여파로 내수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들도 20~30%씩 인원을 줄이던 시기였다. 이날 회의는 경기 침체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구조조정이 주요 이슈였다.잠시 후 김명원 범우연합 회장(당시 범우화학 사장)이 입을 열었다.“회사가 어렵다면 당연히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순서는 사장부터입니다.”창업자인 자신부터 자르라는 말이었다. 결국 아무리 어려워도 구조조정은 없다는 선언이었다. 대신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메시지였다. 마음을 졸이던 직원들은 환호했다. 그 뒤로 임직원들은몸을 던져 연구개발을 하고 영업에 나서면서 범우연합은 세계적인 방청유 압연유 등을 만드는 회사로 급성장했다.범우연합은 범우화학 (주)범우 벡스인터코퍼레이션 BIT범우연구소 등 6개사로 이뤄진 그룹이다. 하지만 그룹이라는 말 대신 연합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룹은 거창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개별적으로 철저한 독립채산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범우연합의 연간 매출은 국내 5개 법인과 중국 베트남 인도 등 3개의 해외 현지법인을 합쳐 약 1500억 원에 이른다. 이 중 내수가 약 65%, 수출 및 현지 판매가 약 35%를 차지한다. 이 중 범우화학은 1973년 창업한 모기업으로 절삭유(cutting fluid), 연삭유(grinding fluid), 세정유(cleaning fluid) 등을 만든다. 서울 양재동에 본사를, 시화공단과 경남 양산에 공장을 두고 있으며 작년 매출은 736억 원이었다.(주)범우는 압연유(rolling oil)와 방청유(anti-rust oil)를, 벡스인터코퍼레이션은 환경 친화형 방청윤활제 및 첨단 바이오제품을 생산한다. BIT범우연구소는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독립법인이며 범우IT루브리컨트는 그리스 등을 만든다.범우연합은 세 가지 측면에서 특이한 회사다.첫째, 1973년 창업했는데 창업 당시부터의 사훈이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인본주의’와 ‘사회공헌’이다. 요즘 들어 국내 기업들이 종업원 존중, 인재 제일주의, 그리고 사회봉사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 회사는 34년 전부터 이 사훈을 사용해 왔다.게다가 중소기업들은 창업 당시에는 사훈이 없는 게 보통이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 만드는 게 통례다. 그런데 김명원 회장(67)은 우선 사훈을 정한 뒤 창업했다.창업 전부터 종업원을 존중한다는 생각이 깊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경력과 연관이 있다. 그는 서울공고와 한양대 화공과 졸업 후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 등지에서 3년 동안 사진화학을 공부한 뒤 중앙대에서 9년 동안 강의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독일에 있을 때 유럽식 경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주주만을 중시하는 미국식 경영과는 달리 유럽 기업들은 종업원 주주 거래처 등 이해관계자를 모두 중시하는 경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도 중요한 경영 요소였다.이에 감명을 받아 사훈을 정한 것. 하지만 일반적인 사회공헌에서 말하는 ‘공헌(貢獻)’ 대신 그는 ‘공헌(功獻)’이라는 한자를 사용해 사훈을 만들었다. 단순히 사회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뭔가 공을 세워서 헌신한다는 의미다.외환위기 때 감원하지 않은 것도 이 같은 경영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 회사는 창업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명도 구조조정을 한 적이 없다. 직원들의 충성심이 높은 것은 물론이다. 또 전체 지분 중 25%가량을 직원들이 갖고 있다. 김 회장의 지분보다 훨씬 많다. 김 회장은 자기 지분의 상당 부분을 포스텍(포항공대)과 범명장학재단 등에 무상 기증해 지분 비율이 10% 수준으로 낮아진 상태다.둘째,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회사의 생산 제품은 세계 정상급 제품이라는 점이다. 이 회사는 아예 ‘세계 1등 제품이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예컨대 포스코에 납품하는 냉간압연유를 보자. 포스코는 냉연강판 생산 실력이 세계 최고 수준인데 두께 0.2mm의 냉연강판을 분당 2100m의 속도로 뽑아낸다. 초당 35m에 이른다. 이렇게 초고속으로 얇은 철판을 균일한 품질로 뽑아내기 위해선 양질의 냉간압연유가 필수적이다. 냉간압연유는 철판을 빠른 속도로 식혀주고 롤러와 철판간의 마찰을 최소화해 고속 생산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게다가 녹스는 것을 방지하는 방청 기능도 한다. 이 회사는 포스코가 사용하는 냉간압연유의 90%가량을 공급한다. 최근 중국의 본계철강은 세계적인 압연유업체 5개사로부터 압연유를 제공받아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이 중 범우 제품만을 유일하게 합격시켰다.방청유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내 굴지의 자동차 철강회사들은 범우 제품을 사용한다.이 회사가 만드는 제품 중 절삭유는 강 주철 비철의 절삭 및 연삭에 사용되는데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GM대우자동차 만도기계 등에 공급한다. 이 회사의 절삭유는 가공성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내부패성 내식성이 뛰어난 장점을 갖고 있다.대형 구조물과 전기 전자제품에 쓰이는 방청유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포스코 동부제강에 납품한다. 방청유는 기본 기능인 부식방지뿐만 아니라 내산성 내습성이 강한 특징을 갖고 있다.철과 비철금속의 압연에 쓰이는 압연유는 포스코 동부제강 현대하이스코 등에, 금속열처리에 사용되는 열처리유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동우열처리 효성기계 등에 납품한다.셋째, 해외에서 기술 수출에 따른 로열티를 받을 정도로 연구개발 능력이 뛰어난 기업이다. 이 회사는 중국과 베트남 인도에 현지 공장을 세워 해외 기업들과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 제품을 공급하는 것과는 별도로 동구권 등 몇몇 해외 기업들로부터 기술 제공에 따른 로열티를 받고 있다.이는 이 회사의 연구개발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범우의 연구개발 인력은 60명에 이른다. 전체 직원 350명의 17%에 이른다. 이 중에서 석박사급도 많이 있다.김 회장은 “기술력과 인적자원을 감안해 세계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분야에만 집중하는 게 경영 방침”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국내 시장은 협소해 해외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다 보면 세계적인 업체와 경쟁할 수밖에 없다”며 “1등 하지 못할 분야는 아예 진출할 생각을 하지 마라”고 선언한 상태다.이 같은 세계 일류화에 대한 집념을 인정받아 김 회장은 지난 2004년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기업인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것을 비롯, 국무총리표창 산자부장관표창 등 각종 상을 받았다.김 회장은 “사람은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며 모든 가치실현의 원천”이라며 “직원들이 더욱더 주인의식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강조한다.약력:1940년생. 60년 서울공고 졸업. 66년 한양대 화공과 졸업. 67년 독일에서 사진화학 연수. 70년 미국에서 사진제판학 연수. 71년 중앙대 사진학과 강사. 73년 범우화학 창업. 82년 (주)범우 창업. 90년 범명장학재단 설립 및 이사장(현). 수상;금탑산업훈장 국무총리표창 등 다수.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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