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불행이 낳은 다섯 번의 불효

인간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할 때마다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은 불효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섯 번에 걸쳐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다. 모두 우리 시대의 역사에 대한 진지함에서 불거진 것이었다.첫 번째 불효는 사춘기 시절에 저질렀다. 당시 필자는 어떻게 살고 죽느냐, 어떻게 인격을 닦아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다가 마침내 ‘출가(出家)’를 결심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오신 아버지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중학교에 가면서 행동거지가 의젓해 네 생활에 대해 일절 간섭이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너를 믿어서다. 그런데 네가 나와의 인연을 끊고 ‘중’이 되겠다는 게 무슨 연유냐?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너는 내 아들이고, 한산 이씨 집안의 자손이라는 건 변함없다. 더 심사숙고해 봐라. 절에 가야만 인격을 닦는 건 아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우셨다. 철이 없었던 나는 절에 가서야 비로소 중생과 더불어 씨름하고 단련돼야 더 큰 깨달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번째 불효는 1971년, 학교에서 제적돼 강제 입영당한 일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장기 집권 기도를 저지하기 위한 학원 병영화 반대와 부정부패 규탄 시위 주동자 혐의로 갑자기 신체검사도 없이 전국의 180여 명 대학생과 함께 군대에 끌려가게 됐다. 아버지가 대전 병무청까지 오셔서 차에 오르는 나를 붙잡고 “남자는 강해야 한다. 몸조심해라” 하시면서 눈물과 함께 돌아서셨다. 그 쓸쓸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필자는 논산훈련소로 향했다.세 번째는 1975년, 나로 인해 면장 자리에서 쫓겨나신 일이다. 서울대 5·22 데모 사건에 친구 채광석 군(시인)이 수배당하고 그와 가까웠던 필자도 쫓기게 됐는데 그 불똥이 엉뚱하게도 당시에 보령군 미산면 면장을 하고 계셨던 아버지에게 떨어진 것이다. 태안군 면장을 하시던 채광석 군의 부친도 졸지에 의원면직을 당하셨다. 50대 초반이셨던 아버지는 갑자기 실업자가 됐고, 300만 원 정도의 퇴직금만 받고 힘이 쭉 빠진 아버지를 차마 상면할 수 없었다. 군사정권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는 길만이 아버지의 좌절과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라고 믿었지만, 그게 아버지의 참담하고 막막해진 삶을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네 번째는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군홧발 소리가 요란하던 때에 집안의 장남인 필자가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구속된 것이다. 엊그제까지 친구였던 지역의 유지들이 ‘역적질한 놈의 아비’로 몰아 두려운 시선으로 피하거나 앞뒷집 사람들이 밤낮으로 집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형편이니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두 달 정도 자식의 행방을 알지 못해 애를 태우시던 아버지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돼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자식을 만나러 면회실에 오셨다. 재판을 앞두고서였다. 그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몸은 괜찮으냐?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몸이 많이 상했을 테니 잘 건사하거라.” 이번에는 거꾸로 감방으로 돌아와 필자는 혼자 울었다.다섯 번째는 손자를 낳아드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집안 제사는 물론 한산 이씨 대소사를 책임지셨던 분이시라 대를 잇는다는 점을 가장 중히 여기셨을 텐데도 한번도 ‘아기’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기다리고만 계셨다. 결국 필자는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눈을 감으시게 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몸져 누워계셨는데, 필자에게도 제일 어려웠던 때이기도 해, 맘 편히 모시지도 못했다.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인생 내내 조국과 역사를 껴안고 사는 큰아들로 인해 세상의 가장 몹쓸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신 것 같다. 8월이면 1주기다. 오호! 부디 불효막심한 자식을 용서하시고 고이 잠드소서!글 /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1950년 출생해 국민대 법대와 고려대 노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민주화와 노동운동으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가 88년 특별 사면 복권됐다. 2001년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으로 들어가 2002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현재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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