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명문가에서 배우는 경영 34-남명 조식의 '칼의 노래'

칼 찬 선비…‘인간의 길’ 깨우쳐 줘

조선시대를 통틀어 16세기만큼 인재들이 많은 시기도 드문 것 같다. 퇴계 이황(1501~70)과 율곡 이이(1536~84), 서애 류성룡(1542∼1607), 이순신(1545~98) 등 쟁쟁한 인물들이 동시대를 살다갔다. 남명 조식(1501~72)도 빼놓을 수 없다.남명과 퇴계는 경상을 대표하는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면모를 보였다. 퇴계는 경상좌도, 남명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퇴계가 안동에서 벼슬과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면 남명은 고향인 합천과 처가인 김해, 그리고 지리산이 올려다 보이는 산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평생 벼슬 없이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퇴계와 남명은 동갑이지만 평생 단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다. 남명은 퇴계가 먼저 세상을 뜨자 ‘학문적 라이벌’의 죽음 앞에 자신의 죽음 역시 머지않았음을 직감하는 말을 남겼다. “나기도 같은 해에 났고 살기도 같은 도(道)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어찌 명(命)이 아니랴?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게다.” 남명은 2년 후에 돌아갔다.두 사람은 벼슬을 두고 올린 사직소도 대비된다. 남명은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 받고 이를 거절하며 을묘사직소(단성소)를 올린다. “임금이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도 남명의 글은 막힘이 없다.퇴계는 이보다 3년 뒤에 벼슬을 사임하며 ‘무오사직서’를 올린다.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어려서부터 임금을 섬기는 도는 익히 들었사옵나이다. 이른바 ‘불사가(不俟駕: 임금이 부르면 수레를 기다릴 틈 없이 바삐 감)’가 임금께 공경을 다하는 일인 줄 어찌 모르겠습니까….” 남명은 상소에서도 거절의 뜻을 명확히 한 반면 퇴계는 상소에서도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 퇴계는 그러면서 무려 53번이나 사퇴원을 냈다. 성정의 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한번은 임금이 남명에게 주부(정6품직)라는 벼슬을 내렸다. 남명은 이를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대사성이던 퇴계가 남명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에 나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 그래도 남명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남명은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제자도 많았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조정이 부패해도 과거에 응시하라고 했고 서애 류성룡 등 그의 제자들은 벼슬길에 올랐다. 어쩌면 이런 두 사람의 면모가 500년이 흐른 지금 두 가문과 학파의 번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최근 류성룡이 세상을 뜬 지 400주년을 맞아 그 후손들과 이순신의 후손, 당시 왜군 적장의 후손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애의 생애와 그의 리더십 또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더욱이 그의 스승인 퇴계 후손과 그의 학맥은 지금까지 번성하게 이어오고 있다. 영남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라면 퇴계 종가와 혼사를 맺었다. 퇴계 후손은 1970년 초에 ‘퇴계학연구소’를 세워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16세기를 주도한 인물들 가운데 유독 남명의 직계 후손은 절손(絶孫)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남명의 학맥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는 남명의 제자로 당시 북인 정권의 영수였던 정인홍이 일으킨 정치사의 질곡과 무관하지 않다.남명이 평소 칼을 차고 다닌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무인다운 성정이었다고 한다. 남명의 그 다른 점이야말로 남명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을 찬 선비’로서의 남명은 혼탁한 시대와의 불화로 일관했다. 그는 끝내 ‘처사’로 일관한 삶을 살다 갔다. 남명이 죽자 선조는 남명의 인물됨에 걸맞게 대사간직을 추증했다. 남명의 길은 분명 퇴계의 길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남명은 퇴계가 있었기에 빛나고 퇴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어쩌면 남명은 위기 관리나 지속 가능한 경영에는 실패한 최고경영자(CEO)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인간의 길’을 그는 깨우쳐주고 있다. 그의 길에는 때로 의(義)를 일깨우는 ‘칼의 노래’가 흐르기 때문이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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