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전하지 못한 고백 ‘사랑합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시절, 아버지는 우리 학교의 선생님이셨다. 나는 매일 아침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등교했다. 아버지면서 동시에 선생님이셨던 당신의 널찍한 등에 기대 등교할 때면, 비록 어린 마음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존경심, 위대함과 같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아버지를 향해 인사하면 마치 학교에서 우두머리라도 된 양 어깨가 으쓱해졌다.내가 4학년에 올라가면서 아버지는 1년간 경북 영양군 수비면 오리초등학교 교장을 맡으셨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집에 찾아오셨는데, 워낙 가끔씩 뵈었기에 점점 아버지와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 또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서 그렇게 커다랗던 아버지가 점점 작게만 느껴졌다.사회인이 되어 영양군으로 출장을 가면서 아버지가 일 하셨던 오리초등학교를 찾아가 봤다. 언젠가 반드시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학교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포장되지 않은 길가에 꽃과 풀이 우거져 이미 폐허가 된 작은 학교가 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 학교가 이미 폐교됐다는 것보다 학교가 있던 곳이 엄청난 오지였다는 사실이다.황량한 학교 앞에 서서 난생 처음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 이런 곳에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셨었구나, 얼마나 고생하셨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에서 무엇인지 모를 뜨거움이 차올랐다. 아버지 혼자 보냈을 수많은 밤과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면서 집까지 힘겹게 돌아오곤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갔다. 그동안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존경의 말 한마디도 잘 건네지 못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교단을 위해서 당신의 세월을 희생으로 채우셨는데 말이다.그 후, 하지정맥류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2년 앞두고 교단에서 내려오셨다.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퇴임식을 조촐히 치르던 날,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말씀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계시다가 “학창시절에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셨다. 그 감정을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계셨던 걸까.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나는 왠지 그때의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져 서둘러 방을 나왔다. 마음속으로는 오리 초등학교에서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언젠가 꼭 말씀드리리라 다짐했지만 그 기회는 다시 찾기 어려웠다.몇 해 후, 아버지는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뜨셨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지 못했던 나는 고백할 기회도 잃어버린 채 눈물만 흘렸을 뿐이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년이 흘렀지만 아버지께 해드리겠다던 그 고백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메아리치고 있다.“사랑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존경합니다.”예전 출장 가서 마주쳤던 그 황량한 학교 앞에서 나는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과 함께 자식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동시에 느꼈다.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 속에서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설레셨을까. 멀리 떨어져 고생하는 아버지를 위해 내가 전화라도 한 통 했다면, 편지라도 한 통 보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때는 집에도 학교에도 전화가 없었지만….요즘 부모와 자식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느낄까. 시골 들판에서 아버지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내가 느꼈던 그 행복감을 우리 자식들도 느낀 적이 있을까. 아버지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글 / 박종수114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는 코이드(KOID)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하고 KT(옛 한국통신)에 입사해 충북 강원 대구 본부장, 연수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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