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의 전쟁’ 다시 불붙다

철은 문명과 산업화의 씨앗이자 뿌리다.부국강병을 꿈꾸는 민족은 예외없이 가장 먼저 제철소를 지었다. 용광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뻘건 쇳물은 국력을 상징했다.세계 최초의 철교인 아이언브리지, 파리의 에펠탑 그리고 철강왕 카네기는 철의 문명과 철강 산업이 밟아 온 ‘철의 실크로드’에서 만나게 되는기념비적인 상징물들이다. 한때 첨단 정보기술(IT) 산업 등에 밀려 ‘저성장 굴뚝산업’, ‘사양 산업’으로 폄훼되는 듯했던 철강 산업은21세기 들어 그 진가를 화려하게 재조명 받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철의 실크로드’는 오늘도 미래를 향해 힘차게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한경비즈니스〉는 해외 현지 취재 등을 통해 ‘철의 실크로드’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가 보고,다가올 미래를 조망하는 특집기사를 준비했다.협찬 = 포스코지난 3월 초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의 ‘대박 투자’가 또 한 번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 워런 버핏 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벅셔해서웨이의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 투자 서한’에서 2006년 말을 기준으로 POSCO의 지분 4%(348만6006주)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그가 POSCO 주식을 사들이는데 들인 돈은 모두 5억7200만 달러. 지난 2월 말 주가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벅셔해서웨이가 보유한 POSCO의 지분 가치는 13억700만 달러에 해당한다. 수익률 128.5%에, 평가 차익만 7억3500만 달러(약 7000억 원)에 달한다. ‘전설적인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회장이 한국의 철강 기업 POSCO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최근 몇 년간 이어져온 POSCO 주가의 가파른 상승세는 이런 의문에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지난 2000년 10월 5만7000원이던 POSCO 주가는 지난 4월 41만3000원을 기록했다. 7년 만에 8배 가까이 뛴 것이다. 지난 한 해만 봐도 상승세는 뚜렷하다. 지난해 1월 19만5000원이던 주가는 같은 해 12월 31만9500원까지 상승했다. 한 해 동안 64%가량 주가가 뛴 것이다. 지난해 KOSPI 연간 상승률이 4%에 채 못 미쳤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과연 POSCO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물론 POSCO의 빼어난 경영 실적은 최근의 높은 주가 상승률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POSCO는 한 해 4조 원가량을 영업이익으로 남긴다. 영업이익률로 따지면 20%대로 세계 초일류 기업에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눈을 해외로 돌리면 또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2000년대 들어 세계 철강 산업은 엄청난 호황기를 맞고 있다. 세계 곳곳의 제철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금도 매일 300만여 톤의 철강을 쏟아낸다. 1990년대 고통스럽던 구조조정의 기억은 어느새 잊혀지고, 치솟는 가동률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2005년에는 ‘세계 철 생산량 연간 10억 톤 시대’가 열리기도 했다.역사적 장기 성장기에 진입극적 반전의 변곡점은 바로 2002년이다. 세계 철강 가격은 2002년 초 바닥을 친 다음 상승세로 돌아서 2005년까지 무려 3배 가까이 뛰었다. 전 세계 철강 기업들이 이러한 가격 급등의 혜택을 누렸다. 이에 힘입어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세계 철강 업종 주가는 4배 가까이 상승했다. 시장조사 업체인 월드스틸다이나믹스는 세계 철강 산업이 2000~15년까지 이어지는 역사상 3번째 장기 성장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앞선 2번의 성장기는 유럽과 북미 지역의 산업화가 진행된 1875~1900년, 전후 재건사업이 펼쳐진 1950~70년을 가리킨다.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극적 반전’의 진원지로 중국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2002~06년 세계 철강 생산량은 연평균 7~8%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율 0.6%로 거의 정체 상태에 그쳤던 과거(1973~2000년)와는 전혀 딴판이다. 가장 큰 요인은 매년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한 중국의 철강 수요다. 2001~06년 중반까지 중국의 철강 수요는 연평균 25% 증가했다. 김주한 산업연구원 소재산업팀장은 “신규 철강 수요의 80%가량이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자동차 산업과 조선업, 그리고 세계 최대 규모의 싼샤댐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경기장 건설로 대표되는 막대한 인프라 투자가 엄청난 양의 철강을 빨아들인 것이다.세계 철강사에서 이러한 중국의 등장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거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철강 산업은 한차례 비약적인 성장기를 맞았다. 전후 복구를 위한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와 함께 주요 철강 소비 산업인 자동차, 건설, 기계, 조선 분야가 강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냉전시대에 불붙은 군비 경쟁도 철강 수요 증가에 한몫했다.그러나 1973년 발생한 ‘오일쇼크’는 20년 넘게 이어지던 호황기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1973년부터 30여 년간 세계 철강 생산량은 연평균 0.6% 성장에 그쳤다. 더구나 철강 가격은 오히려 매년 2~3%씩 하락했다. 만성적인 설비 과잉을 해소해야 했지만 구조조정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제철소의 문을 닫으려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철강 산업의 고용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1992~2000년 세계적으로 철강 산업의 설비 과잉이 25%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1990년 소련 붕괴와 1995년 이후 연이어 터진 아시아, 남미, 러시아의 경제 위기도 가뜩이나 취약한 철강 산업에 악재로 작용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철강 업체들은 자국 내 수요가 말라붙자 세계 시장에 저가 철강 제품을 쏟아냈다. 경제 위기를 경험한 나라의 철강 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당시 아시아에서만 4000만 톤의 철강이 세계 시장으로 추가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당시 세계 철강 수요의 5%에 해당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1990년대 철강 산업은 저성장, 저마진의 사양 산업이라는 이미지로 비쳐졌다. 미국의 경우 1980년 이후 파산 신청을 한 철강 업체가 무려 31개에 달했다. 2000년대 초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국 철강 산업 보호를 위해 외국산 수입 철강 제품에 최고 30%까지 수입 관세를 매기는 초강경 대책을 동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그런데 뜻밖에도 중국 대륙에서 철강 수요가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부터 이런 흐름은 한층 뚜렷해졌다. 철강 업체들에 새로운 ‘부활’의 기회가 날아든 셈이다. 김 팀장은 ‘철강 소비 탄성치’로 중국 수요가 지닌 파괴력을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철강 수요는 경제 발전 단계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경제 발전 초기에는 철강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5000~2만 달러 수준에 올라서면 철강 소비는 다시 감소한다. 경제 전체에서 철강 다소비 업종보다는 고부가가치 소프트 산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커지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과거 30년간 철강 산업을 이끌어온 선진국들의 경우 경제 발전의 성숙 단계에 들어서 철강 소비 탄성치가 1 이하”라며 “이는 경제가 1% 성장해도 철 소비 증가는 1%에 못 미친다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반면 현재 중국의 철강 소비 탄성치는 2를 훨씬 상회한다. 중국 경제가 10% 성장할 때마다 철강 소비는 20% 이상 늘어나는 것이다.중국, 세계 1위 철강 생산국으로중국의 철강 수요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일 것은 분명하다. 2004년 기준으로 중국의 1인당 철강 소비량은 200kg으로 우리나라의 1970년대 후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김경중 삼성증권 철강금속업 담당 연구원은 “현재 우리나라의 1인당 철강 소비량이 1000kg가량인 걸 고려하면 철강 수요 측면에서 중국의 성장 잠재력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자체 철강 생산 능력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2002~04년 중국은 대규모 시설 투자를 통해 자체 조강 능력을 매년 평균 5500만 톤씩 증가시켰다. 이는 우리나라의 연간 철강 생산량 4800만 톤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그 결과 2004년 말 중국은 철강 순수입국에서 순수출국으로 전환했으며, 2006년 상반기에는 일본 러시아 유럽연합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철강 수출국 자리에 올라섰다. 중국은 이미 세계 철 생산량의 30%가량을 차지한 세계 1위 철강 대국이다.이는 다른 나라에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서정헌 스틸앤스틸 철강산업연구소장은 “최근 몇 년 국내 철강 업체들이 대중국 수출로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며 “중국에서 저가 철강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해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수입 철강 제품의 45%가량을 중국산이 차지했다. 올 들어 중국산 비중은 50%를 넘어섰다. 업계 전문가들은 저가 제품의 경우 이미 중국에 시장을 상당 부분 내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급 철강 제품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 제품은 여전히 중국의 주요 수입품 목록에 올라 있다.중국이 철강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유일한 변수인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철강 수요 증가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세계 2위의 인구 대국 인도는 중국 못지않게 주목받는 시장이다. 인도의 1인당 철강 소비량은 중국보다 훨씬 적은 30kg(2004년)에 불과하다. 성장 잠재력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중국보다 한 수 위다. 브라질과 러시아도 빼놓을 수 없는 미래 시장이다. 그러나 이들이 세계 철강 산업의 구도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양질의 철광석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브라질과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싸게 철강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이다.2002년 시작된 철강 산업의 호황은 ‘대형화’라는 또 다른 흐름을 촉발했다. 철강 수요의 증가와 가격 급등으로 막대한 현금을 손에 쥔 철강 업체들은 인수·합병(M&A)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환경 규제 강화 등으로 신규 제철소 건설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업체의 M&A가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지난해 6월 미탈스틸의 아르셀로 인수는 세계 철강 업계의 ‘빅뱅’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89년 트리니다드토바고의 국영 철강회사 인수로 출발한 미탈스틸은 20여 건의 M&A를 성공시키면 성장한 기업이었다. 2004년까지만 해도 주로 중미,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저가 국영 제철소나 서유럽, 북미 지역의 수익성이 악화된 철강사를 사들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2005년 미국 최대의 철강회사 인터내셔널스틸그룹(ISG) 인수에 성공, 세계 1위 철강 기업으로 뛰어오르면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반면 미탈스틸의 적대적 M&A의 ‘희생물’이 된 아르셀로는 2001년 프랑스의 유지노, 스페인의 아세랄리아, 룩셈부르크의 아베드가 합병해 만들어진 세계 2위의 업체였다.이들의 결합은 철강 생산량 1억1800만 톤의 ‘철강 공룡’을 탄생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량 1억 톤 대의 철강 기업이 등장한 것이다. 새로 출범한 아르셀로-미탈은 2~4위권인 신일본제철(3370만 톤), JFE(3200만 톤), POSCO(3120만 톤)를 모두 합친 것보다 생산량에서 앞선다. 김 팀장은 “미국을 주무대로 하는 미탈스틸과 유럽을 기반으로 한 아르셀로의 결합은 아시아를 뺀 전 세계 시장을 주무르는 진정한 의미의 다국적 철강 기업의 탄생을 의미한다”며 “철강 산업의 주도권을 잃어 개별 기업으로는 경쟁력을 상실한 이들 지역의 철강 업체들을 대규모로 묶어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올해 초 이뤄진 인도 타타스틸의 코러스 인수는 또 다른 형태의 결합 유형을 보여준다. 코러스는 1999년 영국의 브리티시스틸과 네덜란드의 코닌클례케 후고벤스가 합병해 탄생한 기업이다. 좀 더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브리티시스틸은 1900년대 초 미국에 주도권을 넘겨주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철강 산업을 이끌었던 영국 철강 업체들이 경영난으로 1967년 합병해 만들어진 회사다. 이 때문에 타타스틸의 코러스 인수는 영국의 자랑이던 철강 기업들이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 업체에 팔려 나가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그러나 경제 논리로만 보면 타타스틸과 코러스의 결합은 이상적이다. 타타스틸은 자체적으로 철광석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코러스는 고급 기술 자산과 시장을 갖고 있다. 용광로를 통해 철광석에서 쇳물을 뽑아내 슬래브 등 반제품을 만드는 ‘상공정’은 원료(철광석) 산지에서, 냉연 강판 등 최종 철강 제품을 만드는 ‘하공정’은 판매 시장이 가까운 곳에서 한다는 세계 철강 업계의 최근 흐름에 딱 들어맞는 셈이다. 김도원 보스턴컨설팅그룹 팀장은 “철광석을 확보한 기업이나, 기술력과 시장을 갖고 있는 기업이나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는 마찬가지”라며 “이러한 형태의 M&A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대부분의 전문가들은 M&A를 통한 대형화가 철강 산업 발전의 필수 조건이라는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철강 산업의 집중도가 철광석이나 자동차, 조선 등 전후방 산업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계 1위로 올라선 ‘철강 공룡’ 아르셀로-미탈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상위 10개 기업을 합쳐도 30%에 못 미친다. 반면 철광석은 CVRD(브라질), 리오 틴토(호주), BHP빌리튼(호주) 등 3대 공급사가 세계 시장의 79%를 장악하고 있다. 자동차는 ‘빅6’ 완성차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76%에 달하며, 조선은 한국의 빅3 조선소가 40%를 차지하고 있다. 시장 지배력과 협상력에서 철강 업체들이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김 연구원은 “그동안 철강 업계가 전후방 산업의 틈바귀에 끼여 제 목소리를 못 내왔다”며 “대형화를 통한 제몫 찾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대형화는 생존의 필수조건물론 철강 업계의 대형화가 늦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철강 산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국가 기간산업, 전략 산업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나라가 제철소를 짓고 싶어 한다. 여러 나라에 걸쳐 존재하는 다국적 철강 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또한 철강 산업은 자국 내수시장 중심의 산업으로 성장해 왔다. 무거운 중량 때문에 대형 벌크선이 개발되기 전에는 장거리 수송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철강의 교역 비율은 여전히 30~40%에 머무르고 있다.하지만 대형화는 이제는 긴박한 생존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김도원 팀장은 “철강 산업의 성장기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게 분명하지만, 과거 4~5년처럼 모든 업체가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초호황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며 “대형화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소수의 대형 글로벌 사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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