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한화, 야망과 도전

고객이 꿈꾸는 세상 속으로

지난해 11월 초, 한화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직원 220여 명은 3박4일 일정의 도보 대장정에 나섰다. 그룹 모태인 ㈜한화의 인천 화약 공장 터에서 출발해 새로운 보금자리인 충북 보은공장까지 무려 200km 거리를 2구간으로 나누어 걷는 강행군이었다. 신은철 대한생명 부회장과 정승진 대덕테크노밸리 사장 등 1진 100여 명이 첫 100km를 걸었다. 최근 CI 교체를 계기로 한화그룹에 몰아치고 있는 ‘전사적 대혁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200km 국토 대장정은 애초 “갈대숲이 우거진 인천 개펄에 뿌리 내렸던 선배 한화인들의 불굴의 혼을 되살리자”는 김승연 회장의 지시에 따라 계획됐다. 인천 소래·논현 지구에 자리 잡았던 화약 공장은 한화그룹의 발상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화그룹의 역사는 1952년 고 김종희 전 회장이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던 인천공장을 인수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공장 가동을 멈춘 72만 평의 부지에는 현재 미니 신도시급 대형 아파트단지 ‘에코메트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김 회장이 갑작스럽게 200km 대장정을 지시한 것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김 회장은 지난해 10월 창립기념사에서 유명한 ‘철새론’을 화두로 던졌다. 글로벌 시대에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는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본능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텃새는 좁은 내수 시장에 안주해 있는 현재의 한화를 의미했으며, 철새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미래의 한화를 가리켰다. 창업 이후 화약, 석유화학, 기계 등 전통 내수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한화그룹이 ‘글로벌 경영’이라는 회심의 승부수를 꺼내든 것이다. 3박4일 간의 도보 행군은 김 회장이 철새의 이동 경로에 맞춰 미리 짜놓은 루트를 따라 진행됐다.한화의 글로벌 혁신 드라이브는 지난 1월초 새 CI 선포를 계기로 한층 가속화되고 있다. ‘트라이서클(TRI Circle)’로 이름 붙여진 새 CI는 한화의 경영 철학인 신뢰(Trust), 존경(Respect), 혁신(Innovation)을 뜻하는 세 개의 원이 어우러진 형태다. 이들은 각각 금융, 제조·건설, 유통·레저 등 그룹의 3개 사업부문을 뜻하기도 한다. ‘트라이서클’은 보수적이고 딱딱한 느낌을 주던 기존 CI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겼다. 금융, 서비스 부문의 확대로 소비자 친화성이 강조됐으며 처음부터 국내용이 아니라 철저하게 글로벌 브랜드를 겨냥해 디자인 작업을 했다. 한화그룹은 CI 교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6개 계열사의 사명을 일제히 변경했으며, 올해에만 새 CI 정착을 위해 35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최근 김 회장은 위기의식을 부쩍 강조한다. 지난 1월 새 CI 선포식 직후 계열사 고위급 임원 50여 명을 따로 불러 “올해 변혁이 없으면 큰 위기가 온다”고 경고음을 발했다. 지난 1월 30일 태국 방콕으로 계열사 사장단을 긴급 소집해 연 15시간 ‘마라톤 철야 전략회의’에서도 김 회장의 매서운 질책은 이어졌다. 그는 해외 사업에 부진한 계열사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강하게 주문했다.사실 한화그룹의 최근 뛰어난 경영 실적에서 ‘위기’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한화그룹은 당초 우려를 깨고 지난 2002년 인수한 대한생명을 신속하게 알짜 계열사로 탈바꿈시키는데 성공했다. ‘인수·합병(M&A) 시장의 대어’ 대한생명의 계열사 편입으로 2002년 10조5110억 원이던 한화그룹 자산 규모는 2006년 51조4470억 원(4월 1일 기준)으로 5배 가까이 급증했다. 그룹 매출 규모도 7조8200억 원에서 20조5530억 원으로 크게 뛰었다. 또한 2002년부터 수익성 경영이 자리 잡으면서 4년 연속 1조 원대의 순이익을 기록하는 성과도 거뒀다. 한화그룹은 지난해에도 1조 원이 넘은 당기순이익을 거둔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김 회장은 ‘1조 원대 순이익’은 몇몇 계열사가 거둔 성과일 뿐 실상은 구조적으로 안정감 있는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고 날카롭게 진단한다. 실제로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대한생명과 한화석유화학의 중장기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대한생명은 삼성생명에 이어 국내 생보업계의 확실한 2위로 올라서는데 성공했지만, 금융시장 통합 추세로 업종 구분을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글로벌 경쟁에 노출되고 있다. 또한 석유화학은 경기 사이클이 뚜렷한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석유화학 분야가 하강 사이클에 들어서 향후 5~6년간 어려움을 예상하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통한 신시장 개척뿐이다.올해 55세인 김 회장은 한화그룹 ‘창업둥이’다. 1981년 29세의 나이에 회장에 올라 특유의 결단력으로 한화그룹을 재계 순위 9위의 대그룹으로 도약시켰다.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 인수, 2002년 대한생명 인수에 이은 김 회장의 또 한 번의 야심 찬 도전에 벌써부터 재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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