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어라…’목 놓아 부르는 소야곡

모처럼 맞는 휴일의 가족 식사. 매번 그렇듯 네 살배기 둘째 딸이 식탁을 점령하고, 나는 겨우 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문득 내 유년시절 밥상 풍경이 떠올라 웃음 지으면서도, 그때는 계셨지만 지금은 안 계신 당신 생각에 가슴이 멍해진다.그때 밥상의 상석엔 아버지가 앉아계셨다. 바로 앞에 앉으신 아버지와 눈 한번 못 맞추고 고개 숙인 채 밥만 먹곤 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평범하고 능력이 없는 분이셨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권위를 끝까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그 시대 아버지들 모습 그대로였다.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전쟁으로 포기해야 했고, 격변기 속에 가세가 기울어 어려움을 겪었다. 또 전쟁으로 얻은 파편 몇 개를 평생 몸에 지니고 사셨다. 하지만 몸의 상처보다 평생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한 한스러움이 더 큰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고 웃는 얼굴도 거의 본 적이 없다.아버지 사업이 연이어 실패하고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우리 형제들은 월사금 한번 제때 못 내고 간신히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가난이 싫었던 나는 열 살이 좀 넘어서부터 돈 벌겠다고 여러 번 가출을 감행하면서 아버지 속을 썩이기도 했다.아버지로부터 용돈을 처음 받아본 것이 스물두 살 때다. 내 생일이었는데, 그냥 계시기가 뭐했는지 5000원을 손에 쥐어주셨다. 감격에 겨웠던 나는 그 돈을 쓰지 못하고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놓았다. 그 후 하시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짐을 정리하는 통에 그 액자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가난이 주는 고단함 때문인지 웃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을 정도로 감정 변화가 적었던 아버지. 하루는 그 분의 전혀 다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열 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만화나 잡지를 빌려주는 작은 책가게를 하셨는데, 그날 나는 가게의 쪽방에서 자고 있었다. 깊은 밤 어렴풋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눈을 떴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기타를 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추억의 소야곡’을 부르고 계셨다.“다시 한 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하루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아버지는 음악에 한껏 취하셨다. 그날 아버지의 연주는 최고였고, 나는 어느새 발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그 후 지금까지 나의 애창곡은 ‘추억의 소야곡’이다.쉰여섯 살 되시던 1988년, 고향으로 내려가신 아버지는 황무지를 개간해 과수원을 일궈 놓으셨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직접 심고 가꾸신 결과 과수원은 8년 만에 2만 평으로 늘어났다. 명절 때나 휴가 때 들르면 자식, 손자들과 과수원을 둘러보시는 게 큰 낙이었다. 실패만 하던 아버지 인생에서 비로소 소중한 수확을 거두신 때였다.과수원도 자리를 잡고, 자식들도 사회생활을 착실히 하면서 그제야 인생의 황금기를 누릴 무렵, 아버지는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교통사고였다. 67세, 아직 못 다한 일이 더 많은 분이셨고 뭔가 시작해도 늦지 않은 연세였다. 말 없는 분 아니랄까봐 인사 한마디도 없이 가셨다.돌아가시기 얼마 전 서울에 오신 아버지를 한 특급호텔로 모셔 식사를 대접하고 다소 가격이 비싼 금테 안경을 맞춰드렸다. 그 때는 별 내색이 없으셨는데, 고향에 내려가서는 안경이 닳도록 꺼내 자랑하셨다고 한다. 그게 내가 아버지께 해드린 마지막 효도였다.아버지 가신 후 주인 잃은 과수원은 황폐해졌고 열매도 많이 열리지 않는다. 시골 와서 고생할까봐 어머니는 자식들 중 누구도 과수원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가신 지 햇수로 벌써 7년인데, 아직도 아버지는 종종 내 꿈에 나타나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꿈이라도 꿔 볼까 해도 안 되는데, 아마 네가 걱정돼 자주 오시나보다” 하신다.아버지 살아생전 속 많이 썩인 둘째 아들이지만 나는 믿고 싶다. 아버지가 내 꿈에 오시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 누구보다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 아들이 대견해서라고.오늘 아버지를 꿈에서 만난다면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다. 흥이 나면 ‘추억의 소야곡’도 같이 부르면서. “다시 한 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다.글 / 이웅진 좋은만남선우 대표결혼정보업체 ‘좋은만남선우’ 대표와 한국결혼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이벤트 업체를 경영하다 미팅과 이벤트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결혼 정보 제공 업체를 국내에 처음 도입한 후 꾸준히 결혼 문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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