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명문가에서 배우는 경영 ? - ‘남인’들의 교육투자 300년

후학에 정성…기업가 양산 ‘결실’ 맺어

조선의 몰락 징후가 1700년 영남의 인재들이 조정의 인재 등용에서 배제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특정 세력이 국가 요직을 독점하는 나라에서는 결코 대통합을 통한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없다. 견제되지 않는 절대 권력은 부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은 경술국치를 당하기 이미 300여년 전부터 특정 세력들이 관직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환국이 그 시발이었다. 이 정변으로 ‘남인(조선 중·후기 동인으로부터 북인과 함께 분파된 정파로 주로 이황의 제자들인 영남학파를 지칭)’이 몰락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하며 ‘그들만의 세상’을 열었다. 더욱이 1800년 급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은 다산 정약용 등 범(汎) 남인 세력의 완전 몰락을 불러왔다. 다산은 이때부터 무려 19년 가까이 유배지에 머물러야 했다.300년 동안 영남인이 재상이 된 것은 1866년 서애 류성룡의 후손인 류후조가 우의정에 임명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서애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임명된 이후 274년 만에 그 후손(서애의 셋째 아들인 류진의 7세 종손)이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는 서애라는 가문의 후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남인들의 정치 참여 배제는 그 후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인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했다. 중앙 정치에 발을 내딛지도 못한 향리 출신 지식인의 경우는 더 심했다. 다음의 한 대목을 보면 향리 지식인의 관직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알 수 있다. ‘1867년 이명구(1799~1874)는 고향 상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언젠가는 자신을 관직에 천거해 주리라고 굳게 믿고 의탁했던 예조판서 신석우가 죽었기 때문이다. … 이로써 한평생 관직에 나아가기를 기대한 이명구의 희망은 끝이 났다. 그 꿈은 그의 증조부 때부터 일궈온 것이었다.’ (이훈상, ‘조선후기 향리집단의 좌절과 기억’에서.)이명구는 당시 나이 7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벼슬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한양 고관 집에 신세를 지며 살고 있었다. 벼슬길은 천거를 통해서도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구는 그 기회를 이용하려 했지만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남인들도 고관들에게 천거를 당부하는 등 굴욕을 감수하지 않으면 벼슬길에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지조를 중시하는 선비들은 대부분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했다. 아마도 이들은 먼 훗날의 후손들에게는 새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세대를 이어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그 인고의 세월이 무려 300년이었다.우리나라에서 유독 창업자 가문이 영남에 많은 것은 어쩌면 300년에 걸쳐 좌절된 ‘상승의 욕구’를 그 후손들이 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삼성(경남 의령) LG(경남 진주) GS(경남 진주) 롯데(경북 울주) 효성(경남 함안) 코오롱(경북 영일) 삼보(경북 영양) 풍산(경북 안동) 태광(경북 영일) 대성(대구) 벽산(경남 함안) 쌍용(경북 달성) 한보(경남 진주) 신동방(경남 창원) 등은 모두 창업자가 영남 출신이다. 물론 이들의 신분까지 알 수 없으나 17세기 이후(15, 16세기에는 벼슬의 절반이 영남인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던 영남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노무현 대통령은 신년 연설에서 주목되는 코멘트를 했다. “사람에 대한 투자를 지출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투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경제 발전과 양극화 해소가 가능하고 사회 통합도 이룰 수 있다.” 그의 이 말만은 백번 옳다.하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사람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다. 국가도 과학자 등 고급 인재에 대한 투자에 소홀하다. 노 대통령의 인재 등용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더 우세하다. 이는 비극에 이어 소극의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지식정보화시대에 국가나 기업이 사람에 대한 투자나 적재적소 인재 등용을 소홀히 한다면 그 자체가 적신호인 것이다.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笑劇)으로….” 예컨대 박정희가 비극이라면 전두환은 소극이고, 조선시대 남인이 비극이라면 박정희 이후 지역 차별을 당한 호남인은 소극인 셈이다. 이 땅에서 다시는 ‘소극’이 없기를….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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