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포스트 브릭스다

올 상반기 세계 휴대폰 업계는 희비가 엇갈렸다. 노키아와 모토로라는 사상 최고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한 반면, 국내 업체들은 시장 점유율 하락이라는 쓴맛을 봐야 했다. 승부처는 신흥시장이었다. 노키아와 모토로라는 휴대폰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가 폰을 무기로 신흥시장을 적극 공략해 대박을 터트렸다. 반대로 기존 주류시장에만 매달려온 국내 휴대폰 업체들은 신흥시장이 급팽창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국내 업체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하반기 들어서도 계속 하락하고 있다.신흥시장 잡아야 고성장 가능이는 휴대폰 업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기존 시장이 성숙에 접어들면서 신흥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분야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흥시장이 기업들에 완전히 낯선 존재는 아니다. 경쟁 없이 선점할 수 있는 틈새시장은 언제나 기업들의 최고 관심사다. 최근 신흥시장에 대한 논의가 예전과 다른 강도로 다가오는 것은 신흥시장 자체의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소위 신흥시장으로 불리던 나라들은 안정적인 기업 활동이 불가능할 만큼 각종 위험 요인이 산재해 있는 데다 충분한 구매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원 부국을 중심으로 일정한 구매력을 갖춘 소비 계층이 출현하면서 이런 현실적인 간극이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또한 각국 정부들이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경쟁적으로 펴면서 투자 환경도 크게 개선됐다.신흥시장에서는 시장 선점의 원리는 극명하게 작용한다. 선발 기업이 과실을 독점하고, 시장 점유율도 유리하게 관리할 수 있다. 문제는 수많은 후보 국가 가운데 어느 나라에, 얼마나 빨리 깃발을 꽂느냐다.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크고, 확실한 신흥시장은 브릭스다. 2003년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을 묶어 ‘브릭스(BIRCs)’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지만, 그 이전부터 이들 나라는 세계의 상품과 자본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골드만삭스는 향후 세계 경제를 압도하게 될 이들의 미래를 한층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전 세계가 ‘브릭스 열병’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브릭스에 신흥시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어느새 어색한 일이 됐다. 브릭스는 선진 시장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이미 노출될 대로 노출된 시장이 됐기 때문이다. ‘브릭스’는 이제 신선함보다는 비린 경쟁의 냄새를 풍긴다.브릭스 국가들도 예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브릭스의 대표 주자인 중국은 외국인 투자에 대해 예전과 달리 냉정한 태도로 돌아섰다. 온갖 특혜를 주며 투자 유치에 발 벗고 나서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중국 기업 육성이 새로운 과제로 부각된 데다 과잉 유입되는 해외 자본이 거시경제적인 문제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외자 유입은 중국 내 과잉 유동성을 부르고,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을 가중시킨다. 중국이 과거와 달리 외국인 투자에 고자세를 보이는 배경에는 중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도 놓여 있다. 중국은 외자에 의존한 초기 발전 단계에서 벗어나 질적 성장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나머지 브릭스 국가들의 경쟁 환경도 악화되기는 마찬가지다.이러한 변화는 브릭스, 특히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에 큰 혼란을 안겨 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중국 수출증가율은 지난 2003년 47.8%에서 지난해 24.4%로 떨어졌다. 직접 투자 증가율(2003년 67.4%→2005년 16.8%)과 중국 투자수익률(23.8%→15.0%)도 급락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중국의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대상국이 된 지 오래다. 지난 12월초 우리나라는 수출 3000억 달러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지만, 이런 호조세가 언제까지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뿐만 아니라 수출시장 다변화를 통한 위험 분산을 위해서도 ‘포스트 브릭스’ 개척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포스트 브릭스’ 5개국의 숨겨진 매력‘NEXT-11’, ‘TVT’, ‘E7’ 등 최근 쏟아지는 신흥시장 관련 신조어들은 ‘포스트 브릭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한다. 현재 ‘포스트 브릭스’로 언급되는 곳만 해도 무려 16개 나라에 이른다. 브릭스에 버금가는 매력적인 신흥시장이 되려면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핵심 키워드는 ‘소비시장’, ‘자원’, ‘허브’다. 먼저 자체적으로 소비시장을 형성할 만한 인구와 구매력을 갖추었느냐가 중요하다. 인구 규모로만 본다면 브릭스를 따라올 만한 나라는 없다. 하지만 경제 성장 속도가 충분히 빨라지고 구매력이 급증한다면 매력적인 소비시장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포인트는 자원이다. 자원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자원 부국의 몸값은 더욱 올라갈 게 분명하다. 유가 급등으로 일거에 ‘부자’가 된 카스피해 연안 국가들처럼 말이다. 이들의 경우 기존 시장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소비시장이 좁고, 자원마저 없는 나라라도 일정 수준의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어 인접 거대시장의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조건은 두루 갖춘 축복받은 나라는 현실적으로 극히 드물다. 때문에 이중 한 가지 이상의 조건을 충족시킨 곳은 우선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각각의 특성에 맞는 유형별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이런 기준에서 ‘포스트 브릭스’로 가장 주목할 만한 나라는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태국 베트남 등 5개 나라다.터키는 유럽연합(EU)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한 데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자원 부국과 인접해 있다. 초읽기에 들어간 EU 가입도 터키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터키가 EU에 가입할 경우 EU 25개국 가운데 독일에 이어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회원국이 된다.남아공은 ‘지구촌의 마지막 황금시장’으로 불리는 아프리카의 맹주다. 아프리카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7%, 상품 교역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1994년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안정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해 있다.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GDP가 1만2760달러로 신흥시장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2010년 월드컵 개최도 성장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멕시코는 대표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의 허브’다. 미국 일본 EU 등 선진국을 포함 세계 43개 나라와 FTA를 맺고 있어 수출 교두보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요 글로벌 자동차 업체를 비롯해 많은 제조업체들이 멕시코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또한 세계 5위 산유국에 들만큼 자원도 풍부하다. 1인당 국민소득 1만600달러(구매력 평가 기준)인 1억700만 명의 인구가 있어 소비시장으로서도 매력적이다.태국 역시 중국, 인도, 그리고 5억 명의 인구를 가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또한 다른 신흥시장과 달리 국제 수준의 비즈니스 환경을 제공한다. 태국은 세계은행의 ‘기업환경’ 조사에서 한국(23위)보다 앞선 18위를 차지했다. 각종 세제 혜택 등을 통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서는 한편, 기술과 혁신을 전수받을 수 있는 농업, 대안에너지, 자동차, 패션, 헬스케어 분야의 투자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베트남은 ‘제2의 중국’으로 불린다. 중국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엄격한 태도로 돌아서면서 새로운 제조업 생산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동남아 지역 가운데 노동력의 질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정서적 친밀감도 장점이다. 지난 11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경제 발전에 한층 탄력이 붙고 있다.kjang@kbizweek.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