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는 동창회가 아니다’
“인사는 동창회가 아니다.”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최근 일부 재경부 간부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앞으로 인사 때 행시 기수나 나이 등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하겠다는 뜻이다. 어찌 보며 평범한 인사원칙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권부총리의 메시지는 현재 공석 중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인사와 그에 따라 예상되는 재경부 내 후속인사를 앞두고 나온 것이어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현재 금감위 부위원장(차관급)은 공석이다. 전임 양천식 부위원장은 수출입은행 총재로 옮겼다. 금감위 부위원장 자리를 놓고 재경부와 금감위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 자리에 최유력 후보로 김석동 재경부 차관보(1급)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금감위에선 부위원장 자리를 재경부에 빼앗기면 조직 전체의 인사숨통이 더욱 막힐 것이라며 반발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윤용로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과 문재우 상임위원 등 1급들을 대항마로 내세운 상태다. 그러나 현재로선 김차관보의 금감위 부위원장 승진 이동이 굳어져 가는 분위기다.권부총리가 김차관보를 적극 밀고 있는데다 윤증현 금감위원장도 재무부 시절 김차관보와의 오랜 인연 때문에 그를 비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김차관보에 대해선 청와대에서도 평가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어쨌든 김차관보가 금감위 부위원장으로 영전하면 문제는 그 후임인사다. 재경부 차관보는 장관, 차관에 이어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재경부 내 ‘넘버3’의 핵심요직이다. 차관보 인사에 재경부 관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재경부 관료들은 권부총리의 “인사는 동창회가 아니다”는 말을 상기한다.이 말은 권부총리가 차관보 인사 때 행시 기수와 나이를 파괴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라는 게 과천 관가의 중론이다. 파격 인사의 주인공은 조원동 경제정책국장이다. 조국장은 행시 23회로 올해 만 50세다. 50대 중반의 행시 20~22회 선배들이 1급 승진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조국장이 차관보로 승진한다면 파격임에 틀림없다.그 경우 조국장보다 나이도 많고 행시도 빠른 선배들은 자기 진로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할 처지가 된다.더구나 행시 19~20회의 재경부 1급 관료들도 퇴진 압력을 받게 된다. 때문에 조국장의 차관보 승진은 단순한 파격 인사를 떠나 재경부 조직 전체를 뒤흔드는 파괴력을 가졌다는 게 재경부 관료들의 분석이다.그렇다면 권부총리는 이 같은 파격 인사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그의 의중을 잘 아는 한 관료는 “권부총리가 재경부 핵심 라인을 EPB(옛 경제기획원) 출신으로 채워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부총리-박병원 제1차관-조원동 차관보로 이어지는 ‘거시정책 라인업’으로 자신의 정책구상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의도라는 얘기다. 세 사람은 과거 기획원 시절에도 경제기획국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EPB 동지들이다.한 관계자는 “권부총리가 옛 재무부 출신인 김차관보를 금감위 부위원장으로 밀고 있는 것도 조국장을 차관보로 승진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며 “권부총리가 취임 후 인사에서 옛 재무부 라인보다 EPB 출신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실제 권부총리는 최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대표부에 근무하던 옛 EPB 출신 정택환 국장을 정책기획관으로 불러들였고, 해외 파견 근무하던 안택순 과장도 EITC(근로장려세제) 추진기획단 과장으로 컴백시켰다. 역시 EPB 출신인 김대유 OECD 공사를 통계청장으로 발탁하는 데도 권부총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이와 관련, 재경부 관계자는 “권부총리 입장에선 자신의 임기 중 경기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며 “이 숙제를 풀려면 금융에만 능통한 재무부 출신보다는 거시정책에 능숙한 EPB 출신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제 금융시장 안정 등의 정책기능은 금감위로 넘기고, 재경부는 그야말로 거시정책을 조정하는 부총리 부처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포석이란 해석도 나온다. 그의 이 같은 계획의 성공 여부는 앞으로 이뤄질 금감위 부위원장 인사 이후의 재경부 후속인사가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