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인구 엑소더스

서유럽은 기회의 땅… ‘가자 서쪽으로’

동유럽 국가를 탈출, 서유럽으로 향하는 대규모 인구 엑소더스가 줄을 잇고 있다.과거 냉전체제에서 소연방 시절 동구권으로 분류되던 이들 국가에서 좀더 나은 일자리와 보수를 찾아 서유럽 국가로 떠나는 인구가 매년 크게 늘어 유럽에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폴란드에서 냉동식품 제조업을 운영하는 알렉산더 보첸스키는 서유럽 국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겠다는 종업원을 종종 접한다. 이들은 영국이나 아일랜드로 이민 간 친구들을 보면 아이에게 컴퓨터나 좋은 옷을 사주는 등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자신은 먹고살기도 빠듯하다며 폴란드를 떠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보첸스키는 떠나는 종업원을 붙잡기 위해 월급도 올려줘 봤지만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현재 폴란드 기업인들은 떠나는 종업원을 내버려두자니 연쇄적으로 모두 빠져나갈 지경이고 그렇다고 종업원들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월급을 높여주자니 도저히 채산성이 안 맞아 기업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영국 정부에 따르면 폴란드가 유럽연합(EU) 회원이 된 이후 26만4,000명의 폴란드인이 영국에서 노동을 하기 위해 등록을 마쳤다. 폴란드 정부에 따르면 60만명의 폴란드인이 고국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100만명이 떠난 것으로 추산한다. 특히 EU에 새로운 회원국이 늘어나면서 신생 가입국에서 이 같은 이민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동유럽인들에게 서유럽으로의 이주는 일자리를 찾고 돈을 벌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내년에 EU에 가입하기를 희망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민들 역시 같은 생각이다.그러나 서유럽인들에게 이민은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서유럽인 입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온다는 의미도 된다.유럽집행위원회는 이 같은 동유럽인의 ‘서진’(西進)이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민이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노동력 부족을 보충해 준다는 것이다. 이민에 대한 점증하는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유럽집행위의 이 같은 논리가 대체로 맞아떨어졌다.EU 회원국수가 늘어난 지난 2004년에는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만이 이민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12개 구 EU 회원국들은 이민에 통제를 가했다.올해는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핀란드가 이민 제한을 없앴다. 프랑스도 이민 문호를 점차 개방하겠다고 밝혔다.그동안 이민을 금지한 국가들 역시 여러가지 근로계약 형태를 통해 사실상 동구로부터의 이민을 허용해 왔다. 특히 독일이 자유로워 연간 50만명의 폴란드인에게 단기노동을 허가하고 있다.영국은 이민자수가 가장 많이 증가했는데 약 60만명의 동유럽인이 이주해 왔다. 그러나 이민자의 절대수에서는 독일에 유입된 인구가 더 많다.기존 인구 대비 이민자 비율을 따지면 아일랜드가 가장 높아 400만 인구의 이 나라에 무려 20만명이 이주해 왔다. 물론 대부분의 국가 출입국들이 입국자수는 면밀하게 세는 반면, 출국자수는 잘 세지 않아 이민자수가 실제보다 다소 부풀려져 있다.최근에는 저가 항공 등장으로 인해 항공비가 상대적으로 싸짐에 따라 완전한 이민보다 본국에 적을 두고 타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그러나 당초 계획보다 타국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며 특히 영국의 경우 동구권 이민자들이 본국의 가족까지 불러들여 아예 눌러앉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전체 인구 대비 비율로 볼 때 인구가 가장 많이 빠져나간 국가는 리투아니아로 전체 인구의 3%인 10만명이 서유럽으로 떠났다. 전체 인구의 2%인 5만명이 떠난 라트비아의 경우 정치적 충격이 엄청나다.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에서는 라트비아계가 러시아계에 밀려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지 않을까가 정치·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앞으로 이 같은 유럽 인구의 서진 현상은 동유럽의 경제발전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만약 동구경제가 발달해 일자리가 늘고 생활수준이 서유럽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면 이민은 줄어들 것이다.동유럽 국가 정부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노동력이 서유럽 국가로 이주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만큼 자국의 경쟁력이 유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실업률이 높고 이민자가 많은 폴란드, 슬로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에서는 아직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기업들은 숙련기술자들의 부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인구의 엑소더스로 공식 통계상 EU에서 가장 높은 15.7%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폴란드에서조차 일부에서는 인력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서유럽으로 빠져나가는 주류는 젊고 유능하며 언어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폴란드 고용재단이 실시한 조사에서 조사 대상 기업의 43%가 숙련노동자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폴란드에서는 조선소 인력이 부족하며 농부들도 떠났다. 전체 의사의 5% 가량도 이미 고국을 등졌다. 특히 마취전문의의 경우 16%가 이미 폴란드를 떠났거나 떠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뿐 아니다. 배관공, 지붕업자들도 조국을 떠나고 있다.사태가 이러하자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의 기업들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서 사람들을 찾고 있다. 현재 약 15만명의 우크라아나인이 폴란드에서 불법적으로 취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업은 은퇴한 고령자들을 다시 채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을 정도다.이 와중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의 신규 이민도 EU의 골칫거리다. 이 두 나라는 내년이나 늦어도 2008년에는 EU에 가입할 것이 확실시된다. 만약 내년 1월 루마니아가 EU에 가입한다면 EU 회원국들 중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될 것이다. 영국에서는 루마니아의 가입이 확정될 경우 밀려올 가난한 노동력에 대해 벌써 이민을 제한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루마니아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200만명의 루마니아인이 EU 회원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중 10%만이 적법하게 노동을 하고 있다. 2,170만명의 인구를 가진 국가의 약 10%에 해당하는 인력이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이중 절반 가량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루마니아인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떠난 이유는 언어와 문화가 루마니아와 유사한데다 이들 국가가 인력 암시장 단속에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게다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아직도 농업부문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단순노동을 수월하게 찾을 수 있다.최근 루마니아 경제는 의외로 선전하고 있다. 외국으로의 인력유출 때문인지 실업률은 5.2%대로 낮아졌고 경제성장률도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6%대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이 루마니아 경제가 호조를 보이자 다국적기업들이 앞다퉈 루마니아로 몰려들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용기회도 늘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며 건설회사들은 숙련공은 물론 반숙련공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또한 임금도 오르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건설임금이 거의 두 배로 뛰었다. 이 같은 현상을 보면 루마니아 역시 조만간 외국에서 인력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지난 4월 한 조사에서 루마니아가 EU에 가입할 경우 첫해에만 약 5만명이 영국에서 일자리를 얻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루마니아 경제가 좋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선진 서유럽 국가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이 단기간에 비교적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어 이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국경 없는 노동시장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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