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코끼리밥솥 몰아낸 신화 제조기
한때 전기밥솥 하면 일본 조지루시가 만드는 ‘코끼리 밥솥’을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일본을 다녀오는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코끼리 밥솥’을 들고 오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사회문제로 떠오른 적도 있었다. 국산 밥솥에 비해 성능이 월등하다는 입소문에 주부들 사이에서는 ‘코끼리 밥솥’을 장만하는 게 큰 자랑거리였다. 때문에 98년 말 일제 전기밥솥이 수입제한 품목에서 해제됐을 때 국내 밥솥업체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듬해인 99년 한해 동안 약 600만달러어치의 ‘코끼리 밥솥’이 수입되기도 했다.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현재 국내 밥솥시장에서 ‘코끼리 밥솥’을 비롯한 일제 브랜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시장에서 일제를 몰아낸 주역은 삼성도 LG도 아닌 한 무명의 중소업체였다. 98년 당시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자체 브랜드업체로 막 전환했던 중소기업 ‘쿠쿠홈시스’가 주인공이다. 쿠쿠홈시스는 현재 국내 밥솥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며 ‘밥솥=쿠쿠’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쿠쿠신화’를 만들어낸 주역 중 한 명이 지난 2004년 10월부터 회사경영을 총괄하며 사실상 CEO 역할을 하고 있는 구본학 쿠쿠홈시스 부사장(37)이다. 창업주인 구자신 쿠쿠홈시스 회장의 맏아들인 구부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회계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미국 회계법인 쿠퍼스&리브랜드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 지난 96년 입사했다. 올해로 ‘입사 10년차’를 맞는 셈이다.강산도 변하는 세월인 그 10년 동안 회사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대기업에 밥솥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하던 업체가 국내 밥솥시장을 호령하는 ‘1등 기업’으로 발전했다. 사명도 ‘성광전자’에서 ‘쿠쿠홈시스’로 바뀌었다. 10년 전 300억원 안팎에 머무르던 매출은 올해 10배가 넘는 3,1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구부사장은 지난 10년간 부친을 도와 온갖 위기와 고비를 헤쳐가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부친의 긴급호출을 받고 입사한 96년 당시만 해도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할 위기상황이었다. OEM으로 밥솥을 전량 납품하던 대기업에서 예고 없이 주문량을 크게 줄였던 것이다.구부사장은 우선 해결의 열쇠를 수출에서 찾았다. 입사 이후 1년여간 기술연구소에서 밥솥 만드는 과정과 엔지니어들이 일하는 생리를 익힌 그는 97년 초 해외영업팀으로 자리를 옮겨 동남아 곳곳을 순회했다. 그는 “대기업과의 OEM 독점계약이 국내시장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해외시장은 자체 브랜드로 공략할 수 있었다”며 “수출활로를 뚫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쪼개 수입상과 약속을 잡는 등 강행군을 계속했다”고 회고했다.마침내 수출길이 열렸다. 필립스와 동남아시장에 OEM 방식으로 공급하기로 한 데 이어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체 브랜드 ‘쿠쿠’로 수출계약을 체결했다. 모두 컨테이너 30박스 분량이었다. 구부사장은 또 당시 달러당 800~850원으로 환율이 고평가돼 있다는 생각에 ‘유전스 LC’(기한부 어음 신용장: 수출업체가 수입업체의 신용을 믿고 대금결제일에 유예기간을 두는 것)를 발행해 환율이 1,900원까지 치솟은 97년 말부터 98년 2월 사이에 대금을 거둬들였다. 납품 감소로 어려움에 처한 시기를 버틸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반면 국내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OEM 독점계약을 맺고 있던 대기업이 외환위기로 인한 내수시장 침체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납품중단을 선언했다. 1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전기압력밥솥은 시장에 내놓지도 못한 채 사장될 위험에 놓였다. 사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 빠지자 구회장은 회사를 정리하고 전자부품업체 인수를 통한 사업전환을 고려하기로 했다. 이를 말린 건 구부사장이었다. 그는 “부친이 지난 78년부터 한평생 외길을 걸어온 밥솥사업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설득했다”며 “대기업을 찾아가 OEM 계약을 접은 후 98년 4월 ‘쿠쿠’ 브랜드로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고 말했다.그러나 막 신규 브랜드를 내놓은 중소기업에 시장의 벽은 높았다. 외환위기까지 겹쳐 출시된 지 수개월간 제품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 구부사장은 보수적 경영스타일인 부친을 설득해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은행금리가 20%에 달하던 상황에서 수출과 환차익 등으로 거둔 돈을 그해 11월부터 TV광고 등 마케팅 비용에 쏟아부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대기업마저 TV광고를 못하던 시기에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이 주효해 ‘쿠쿠’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쿠쿠홈시스는 드디어 99년 말 밥솥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르면서 독주체제의 시동을 걸었고 일본 ‘코끼리 밥솥’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삼성, LG 등 대기업들도 밥솥시장을 떠나게 만들었다.구부사장은 이처럼 ‘오너의 아들’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과 실력으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구부사장이 실질적으로 경영을 총괄하게 된 지난해부터 쿠쿠홈시스의 성장세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해 당초 목표로 세운 2,100억원을 훨씬 뛰어넘는 2,750억원의 매출을 올려 전년(1,800억원)에 비해 50% 이상 성장했고 순익도 176억원에서 29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때마침 LG, 삼성 등 대기업이 밥솥시장에서 철수해 반사이익을 누린 영향도 컸지만 현미발아기능 밥솥과 IH황금동 밥솥 등 신제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한 것이 주효했다.구부사장은 ‘쿠쿠신화’의 원동력으로 주저 없이 기술과 제품력을 꼽는다. 그는 “어릴 적에 일요일이면 아버지 손을 잡고 밥솥공장에 따라가곤 했는데 주말에도 쉬지 않고 현장점검과 생산기술 향상에 여념이 없던 부친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며 “납품 중단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자체 브랜드 출시를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78년 밥솥 생산 이래 축적된 기술과 제품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구부사장은 경영에 본격 참여하면서부터 부친의 경영철학을 시스템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구회장의 경영철학은 한마디로 ‘시어머니 경영’이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시어머니 같은 존재가 있어야 회사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OEM 납품 시절 대기업의 까다로운 요구에 직원들이 불평을 늘어놓으면 부친은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문제해결에 전력하라’고 다그치셨다”며 “OEM을 중단한 이후에도 기술제휴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시어머니’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본 마쓰시타전기 등과 제휴를 맺기도 했다”고 설명했다.구부사장이 경영총괄을 맡고 나서부터는 ‘고객의 소리’를 시어머니로 삼고 있다. 고객이 홈페이지에 올린 불만이나 요구사항들이 사내전산망을 통해 해당 팀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도록 했고 24시간 이내에 처리상황이나 개선방안을 보고하도록 했다. 실제로 고객이 올린 글은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내솥을 분리해 흰쌀밥과 잡곡밥을 동시에 지을 수 있는 밥솥, 돌솥밥 맛을 낼 수 있는 돌내솥 밥솥 등 쿠쿠홈시스가 올해 선보인 신제품들은 모두 고객의 니즈를 반영해 탄생했다.또 연초 각 팀별로 혁신과제를 2개 이상 정해 정기적으로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연말에 평가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성과를 내고 있다.구부사장은 테팔, 필립스 등 다국적기업 못지않은 ‘글로벌 일류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매출의 3~5% 수준인 수출비중을 높이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유통망 확대 및 현지 마케팅 강화에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밥솥에 이어 가습기를 자체 브랜드로 ‘종주국’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지난해 950만달러에서 올해 목표인 1,200만달러 수출을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 내수시장에서는 가습기, 전기그릴 등에서도 ‘쿠쿠신화’를 이뤄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구부사장은 “1등 기업이라는 위치에 만족해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혁신노력을 게을리 하면 금방 시장에서 낙오될 수 있다”며 “도전과 목표의식을 회사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불어넣어 항상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회사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구본학 쿠쿠홈시스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