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 최전선서 6시간씩 사투

밤 12시까지 근무도 밥 먹듯… 1분기 수익이 한해 성과 좌우

“27만달러 솔드(sold) 7.3.”“던(done).”“1.2개 7.0 보트(bought)요.”눈은 뚫어질세라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고 한 손엔 전화기가 들려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주문을 알리는 말이 쉴새없이 오간다. 나머지 한 손은 매매내용을 입력하느라 단말기 앞에 가 있다. 알 수 없는 말이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곳은 외환딜러들이 일하는 딜링룸.환율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지난 12월20일 서울 을지로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 19층 딜링룸을 찾았다. 증권운용팀, 금융공학팀 등을 포함한 총 59명의 딜링룸 직원 중 외환거래를 담당하는 외환운용팀은 13명. 그중 원/달러 딜링팀이 데스크 역할을 하는 수석딜러와 선임딜러 3명, 주니어 2명 등 모두 6명으로 가장 많다. 나머지는 기타 통화와 본ㆍ지점 거래를 담당하는 딜러들이다.암호 같은 외환딜러들의 말을 풀어보면 “27만달러를 1017.3원에 사고 싶으니 팔라”는 말에 “오케이”라고 대답한 것이며 “120만달러를 1017.0원에 팔겠으니 사 가라”는 요청이 이어진 상황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거래를 처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을 줄여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외환딜러는 크게 대고객 딜러(Sales/Customer Dealer)와 은행간 딜러(Interbank Dealer)로 나뉜다. 대고객 딜러는 정유나 자동차업체 등 외환보유액이 많은 고객사의 외환거래를 돕는 일을 하고 은행간 딜러는 은행간 외환거래를 한다. 인터뱅크 딜러로 현물환 거래, 즉 스폿 트레이딩을 하는 외환은행 외환운용팀 선임딜러 구길모 과장(36)은 연신 “던(done)”, 즉 오케이 사인을 내느라 정신없었다. 그는 지난 2004년에 국내 딜러들의 모임인 코리아 포렉스 클럽(Korea Forex Club)이 주는 ‘올해의 딜러상’을 받기도 한 베테랑 딜러다.총원 13명에 불과하지만 외환운용팀은 딜링룸에서 가장 소란한 곳이다. 딜러들이 매매를 위해 끊임없이 고함을 쳐야 하는데다 ‘보이스 박스’에서는 계속해서 역외선물환시장(NDFㆍNon-Deliverable Forward) 상황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온다.“매일 오늘처럼 한가하면 딜러들 다 굶어죽는다”는 구과장의 너스레에도 여전히 분주한 광경이 연출되는 게 딜링룸이다.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딜러들의 하루 일과가 복잡한 까닭이다.오전 8시30분. 딜러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밤사이 거래된 뉴욕, 런던 등 해외 외환시장의 동향을 살펴보려면 출근은 늦어도 8시 전에 이뤄져야 한다. 8시30분부터는 외환운용팀 전체 회의가 진행된다. 원/달러 데스크와 기타 통화 데스크, 본ㆍ지점 데스크가 나서 각각 간단히 이슈를 정리한다.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회의지만 이 회의를 통해 그날 매매의 방향이 결정된다. 기자가 찾은 20일 회의에서는 ‘저가 매수로 방향을 잡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전주만 해도 원/달러 환율이 1,010원 아래로 하락할 분위기였는데 의외로 하락세가 둔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오전 9시. 외환시장 개장과 동시에 딜러들은 ‘멀티 플레이어’로 변신한다. 로이터통신의 금융정보를 비롯해 국내외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정보를 점검해야 하는 까닭에 여러 대의 모니터를 동시에 보는 것은 기본이고 연방 울려대는 전화에도 응답해야 한다. 아무리 한가한 날이라 할지라도 개장 직후 1시간 이내의 딜링룸은 급박하게 돌아간다.온라인 메신저를 이용하는 딜러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띈다. 타 은행 딜러와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다. 갑작스레 대규모 거래가 타 은행 딜러에 의해 발생할 경우 어떤 논리로 그러한 거래를 했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때 고객사의 이름은 물어보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은 ‘딜러행동규범’에도 나와 있다. 최근 외국계 은행을 중심으로 딜링룸이 대형화되는 추세다. 딜러들에 대한 성과급 제도도 정비되고 스카우트 경쟁도 치열하다.개장 이후부터는 딜러들의 활동이 폐장인 오후 3시까지 대체로 비슷하다. 점심때가 되면 약간 느슨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점심식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과장도 자장면이나 김밥 한 줄, 햄버거 등이 주요 점심 메뉴다. 대개 자리를 뜨지 않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모니터를 응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종의 직업병이 돼 휴가지에서도, 집에서도 PC를 켜놓지 않으면 불안한 딜러들이 많다.그래도 거래량과 관계없이 외국계 은행 딜러들이 휴가를 떠난 12월은 원래 한가한 시즌이기도 하다. 딜링룸은 연초가 가장 바쁘고 활기차다. 1~3월까지의 손익이 1년 성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아 1월은 딜러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달이다. 1분기가 지나면 대개의 딜러들은 1년 수익의 4분의 1이 아닌 50% 가량을 벌어들인다는 게 구과장의 말이다. 여름 휴가철 등 비수기를 이것저것 제외하고 나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시장상황이 많지 않아서 연초에는 외환시장이 북적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 “이슈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활기차게 시작하는 게 보통”이라는 신년인데다 특히 2006년은 연초부터 환율이 하락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돼 외환시장의 큰 변화가 점쳐지는 만큼 구과장 역시 기대가 크다.구과장처럼 스폿 트레이딩을 하는 딜러들에게 장기 전망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말이다. 거래가 활발하지 못해 심지어 지루한 느낌까지 드는 날에는 오히려 군것질만 자주 하게 된다고 했다. 정말 이날 그의 자리에는 두 잔의 빈 커피 잔과 생강차가 든 보온병, 커다란 물통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자리를 지키며 먹기만 하고 화장실은 못가게 되니 방광염, 치질 등은 딜러가 걸리기 쉬운 직업병이다. 안구건조증, 만성비염 등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딜러들에게 운동은 필수다. 구과장 역시 지난해부터 헬스클럽에 나가기 시작했다. 검도나 인라인스케이트 등 몸으로 즐기는 취미를 가진 딜러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오후 3시. 이날 원/달러 환율 종가는 ‘6.5’(1016.5원)였다. 개장 직후 1시간이 바쁘듯 폐장 직전 1시간도 딜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3시 이후에도 말이 폐장일 뿐 잠깐 숨을 돌린 후에 거래를 계속하는 일이 잦다. 은행의 각 지점을 통해 달러를 요청하는 고객이 있는데다 유럽이나 뉴욕 외환시장도 곧 문을 열기 때문이다. 뉴욕외환시장은 한국시간으로 오후 10~11시에 문을 연다. 런던의 경우 오후 3시면 환시가 열린다. 또 3시 이후에도 보이스박스에서는 홍콩 등지의 역외거래 동향이 계속 방송된다.구과장은 운이 좋은 날은 1억~2억원까지 혼자 수익을 내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5,000만~1억원대의 수익을 남긴다. 이날 장마감까지 구과장이 낸 이익은 평균치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 역시 그의 말대로 한산한 날이었던 셈이다. 이날은 언론의 전화도 적었다. 환율의 변화가 많은 날이면 어김없이 매스컴 관계자들의 전화를 받지만 이날은 단 두 군데에서 문의전화가 왔을 뿐이다.구과장은 자신 같은 딜러가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기만을 바란다는 편견을 버리라고 말했다. 하락세든 상승세든 장기 전망보다는 장중 움직임이 큰 것을 바란다는 얘기다. 다만 딜러가 가져야 할 덕목은 논리다. 자신만의 논리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 특히 나만의 기준을 세워 손절매를 잘하는 딜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욕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오후 7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하지만 밤 12시까지 남아 있는 날도 예사다. 뉴욕외환시장 개장 이후 3시간쯤은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퇴근을 한다 하더라도 집에 오면 곧장 블룸버그통신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이렇다 보니 오전 1시 이전에 잠들기는 어렵다.“40대가 되면 현직에서 떠나려는 딜러가 많다”는 고과장의 말처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된 일이지만 그는 “몸이 피곤한 것은 힘든 게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딜러가 가장 힘들 때는 돈을 벌지 못할 때”라는 구과장은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일하는 직업이니만큼 ‘집중과 이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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