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벤처 신흥메카…‘여기 공단 맞아?’

45개 아파트형 공장에 4천개 업체 입주 … 호텔도 들어설 예정

11월 초 CJ인터넷으로부터 한 통의 e메일을 받았다. 제목은 ‘사옥이전’. IT기업이든 벤처기업이든 최근에 회사가 이사를 간다고 하면 십중팔구 장소는 구로동이나 가산동이다. 바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다. CJ인터넷도 5년간의 강남 테헤란로 시대를 마감하고 이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기존 사무공간을 2배나 늘려 가는데다 게임개발 계열사들까지 통합근무를 할 수 있게 돼 ‘훨씬 좋다’는 회사측의 반응을 보며 6년 전의 일화가 떠올랐다.기자가 입사지원서라는 것을 처음 썼던 1999년. 이곳저곳 원서를 넣은 후 얼마쯤 있다가 한 수출업체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가발을 생산하는 이 중소기업의 위치는 ‘구로공단’.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갑자기 우중충한 회색빛 공장건물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광경이 머리를 스쳤던 건 왜였을까. 결국 단지 그 회사가 구로공단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접은커녕 아예 기억 속에서 회사의 이름마저 까맣게 지워버리고 말았다.그러나 2005년 현재 그때의 일화는 말 그대로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됐다. 바로 기자가 막연하게 상상했던 ‘구로공단’은 이미 사라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000년 12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꾼 이곳에는 유리로 장식된 15~20층 높이의 고층 아파트형 공장들이 즐비하다. 건물 앞쪽에는 벤치와 나무들로 도심 속 공원이 꾸며져 있다. 분수대와 연못, 야외공연장이 마련된 곳도 있다. 아파트형 공장 내부는 더 ‘환상적’이다. 공장인지, 일반 오피스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다 못해 화려하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과 문구점, 은행, 병원 등 각종 지원시설이 자리잡고 있으며 일부 건물에는 로비 중앙부터 꼭대기층까지 중정(中井)을 설계해 채광과 환기성을 높이고 있다. 하드웨어적인 변화만으로도 이미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공업단지’가 아니다.이런 변화는 97년부터 시작돼 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 지역 스카이라인은 그저 외형상의 변화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벤처ㆍ지식산업 집적지 ‘디지털밸리’로 상전벽해= 1998년 483개사가 입주해 있던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2000년 입주업체수가 712개사, 2005년 9월 현재 4,648개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지난해 9월(3,048개사)과 비교해도 증가율은 1년새 52.4%에 이른다.이렇게 빠른 속도로 입주업체가 느는 것은 덩치 큰 굴뚝 제조업체 대신 IT(정보통신), 소프트웨어 등 첨단 벤처기업과 바이오, 엔지니어링, 영화 및 문화산업 콘텐츠 등 지식산업 업체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날렵’하지만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첨단업종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총면적 198만2,000㎥(59만9,000평)로 한정된 서울디지털단지에 지속적으로 많은 업체들이 신규 진입하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고층화됐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총 45개 아파트형 공장이 준공됐고 현재 11개가 건설 중이며 허가를 받고 착공을 준비 중인 곳도 13개나 된다. 풍림, 대륭, 에이스 등 중견 건설사들이 대거 진출해 아파트형 공장 건설 붐을 주도했다. 이곳은 단지 전체를 첨단 아파트형 공장들이 완전히 뒤덮고 있다.평균 아파트형 공장 한 곳당 100여개사가 입주하는 점을 감안하면 총 69개의 아파트형 공장이 완공되는 내년 말께는 이 지역 내 업체수가 7,000여개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한편 이 지역이 어떻게 ‘수출공단 1번지’에서 국내 최대의 ‘벤처기업 요람’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가는 입주업체들의 업종변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1960년대 구로공단이 수출산업 육성을 위해 국내 최초의 산업단지로 출발한 이후 이곳은 노동집약적 업종인 섬유와 봉제 등 경공업체들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70~80년대 섬유화학, 기계, 전자업종이 자리잡기 시작, 90년대 이후에는 반도체, 정보통신 등 기술집약적인 첨단산업으로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있는 것이다.2005년 현재 서울디지털밸리 전체 입주업체의 43.2%는 비제조업. 그 뒤를 전기ㆍ전자(26.7%), 기계(13.8%), 섬유ㆍ의복(6.1%), 목재ㆍ종이(4.4%), 석유화학(2.8%)업종이 잇고 있다.◇클러스터(Cluster)와 구조고도화 추진, 핵심은 소프트웨어다= 전국 산업단지가 혁신클러스터화의 바람을 타고 있다. 클러스터란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대학이나 연구기관과 생산을 맡은 기업체, 상품판매 및 경영활동을 지원할 각종 지원기관 등이 포도송이처럼 얽혀 네트워크를 맺으면서 집적 시너지를 내자는 개념이다.현재 서울디지털단지는 시범단지에서 제외돼 있지만 인프라 측면에서 보면 국내에서 가장 클러스터 구축에 유리한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서울의 유일한 국가산업단지로 서울권의 모든 대학, 대학부설 연구소와 교류가 쉽고 시험기관이나 공공 연구소가 입주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디지털밸리는 실제 이런 장점을 살리기 위해 입주자격을 제조업 이상으로 확대하고 있다.이 지역의 또 다른 장점은 ‘인력공급’이 수월하다는 점이다. 서울은 고급인력을 조달하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다. 클러스터를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이 기대되는 지역일 수밖에 없다.구조고도화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관리기관인 한국산업단지공단과 금천구, 구로구 등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새로운 계획이다. 이곳을 연구ㆍ주거복합단지로 확 바꾼다는 내용이다.이미 한국산업단지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1단지와 2단지 사이 4만여평을 배후주거단지로 조성하고 디자인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고급인력을 위한 연구단지로 조성키로 했다. 배후주거단지에는 총 3,000여가구가 들어서며 소프트웨어산업 육성을 위한 IT혁신클러스터센터를 비롯해 디지털역사박물관과 산업교류센터 등 연구지원시설을 세운다는 복안이 논의되고 있다.또 배후단지 조성과는 별도로 가리봉5거리(공단5거리)를 중심으로 한 도로망 확장과 단지 곳곳에 중소 규모의 생태ㆍ과학공원 등이 조성되며 호텔과 컨벤션센터 등 주거와 상업ㆍ공공시설이 어우러진 복합클러스터로 단지 전체를 새로 구축할 전망이다.2015년까지 추진될 구조고도화 사업계획은 산업단지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도로와 주거시설, 공원 등 기반시설 확충과 연구ㆍ교육시설 등 혁신자원 유치가 주요 목적이다.구체적으로는 아파트형 공장이 가장 많은 1단지(13만7,000평)는 정보통신(IT) 및 소프트웨어산업을 전략산업으로 하는 ‘IT혁신클러스터’로, 연구시설과 패션타운으로 조성하려 한 2단지는 산학연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디자인전문대학원 설치와 의류 관련 기관ㆍ단체를 유치하는 ‘전자ㆍ패션디자인 산업단지’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3단지는 34만평 용지에 벤처ㆍ중소기업 관련 기술연구소를 비롯해 산업교류센터 및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울디지털박물관 건립 등이 추진된다.◇달라진 인적구성, 젊은 벤처인 ‘디밸족’ 등장= 서울디지털단지가 외형상 강남이나 여의도의 첨단 오피스텔지구가 부럽지 않게 되면서 이곳의 주역들도 변모했다. 하루 종일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개발연대의 ‘눈물의 주인공’들은 사라지고 대신 캐주얼 차림이나 말끔한 양복차림의 젊고 발랄한 신세대 벤처기업 직장인들로 꽉 들어 찬 것이다. 빵보다는 삶의 질을 중요시하는 이들 ‘디밸족’(디지털밸리족)이 인근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다.이들 20~30대 젊은 벤처인력들이 대거 유입된 덕에 공단 근처에는 외국어회화학원, 헬스클럽, 골프연습장, 패밀리레스토랑,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등 이들의 생활패턴을 반영하는 상업시설들이 빠르게 생겨나고 있다.웹하드 기능이 첨가된 외장형 저장장치를 생산하는 유비스토리지의 시스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인 한욱씨(28)는 하루를 서울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구로공단역) 근처 M어학원에서 시작한다. 업무가 끝날 즈음인 오후 8시께는 회사 건물에 위치한 헬스클럽을 찾는다. 한씨는 “지난해 가을 회사가 등촌동에서 구로공단으로 이전할 때 ‘공단지역이면 회화학원이나 헬스클럽도 변변히 없는 건 아닐까’ 하고 내심 걱정했었다”며 “그러나 생각보다 여건이 괜찮다”고 말한다. 건강과 자기계발, 여가를 활용한 취미생활 등에 민감한 디밸족을 중심으로 이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새로운 진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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