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수출 전진기지 ‘자리매김’

한국과 김치전쟁을 벌이는 중국은 김치생산 및 수출기지로서는 이미 종주국인 한국의 위치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내수시장은 이제 시작단계라는 게 현지진출 김치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 와중에 중국의 김치산업이 지금 종주국 한국과의 전쟁으로 재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한국 정부가 중국산 김치에 기생충 알이 추가로 발견됐다고 발표한 지난 10월28일. 중국 칭다오에서 1시간 떨어진 위성도시 라이시(來西)시의 한국계 김치회사 ‘청수림식품’은 잔치 분위기였다. 한국업체 영림기업이 투자한 이 공장이 개업식을 가진 것. 시정부 관리들까지 나와 현장에서 생산된 김치를 시식하기도 했다.‘불량’으로 매도되는 터에 중국 김치공장에 온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장은 더욱 그랬다.중국의 검역당국과 함께 설계를 했다는 이 공장은 배추 등 원ㆍ부자재의 농약 및 납 함유량 등을 자체 조사하는 실험실을 갖추고 있다.하얀 작업복을 입은 작업자들은 일회용 장갑을 끼고 소독한 후 테이프로 작업복의 먼지를 털어낸 뒤 에어샤워를 거쳐야 라인에 들어갈 수 있다. 눈만 겨우 보일 정도의 위생가운과 모자를 쓴 작업자들은 반도체공장을 연상시킨다. 포장 직전 단계의 라인에는 금속성 이물질을 0.02㎎까지 감별해낼 수 있는 탐지기가 설치돼 있다.이 회사 강종수 사장은 “정식 개업에 앞서 두 달 전부터 생산과 판매를 해왔다”며 “이 정도의 작업환경을 갖추지 않고는 중국당국으로부터 수출허가를 정식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제대로 위생환경을 갖추지 않은 현지공장에 불법적으로 재하청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불량김치’ 파동을 빚은 일부 한국업자들의 행태가 ‘규정대로’ 위생관리를 하고 있는 한국계 공장 전반에 불똥을 튀기고 있다는 것. 강사장은 “시험가동 기간 중에도 일주일에 김치를 4~5개 컨테이너(20피트급ㆍ16t) 정도 한국으로 내보냈는데 지금은 일절 중단돼 손해가 적지 않다”며 “저장창고가 큰데다 내수용도 있어 라인을 일부 가동 중”이라고 말했다. 청수림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상당수 김치 수출업체들은 아예 조업을 중단한 상태다. 칭다오시 청양구에서 김치를 만드는 한국업체 J식품도 그중 하나다.공장문에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는 이 회사는 6개월 전 최신 위생시설을 도입했는데 김치 파동으로 일시 가동을 중단했다.늘 영하 2도를 유지하던 냉동 저장고도 비어 있다. 지명도가 있는 한국 식품기업의 중국 현지 김치공장들은 가동되고 있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두산의 종가집 김치를 베이징에서 생산하는 두산베이징식품의 성석진 법인장은 “계약 재배한 배추를 네 차례 씻는 등 엄격한 관리절차는 한국과 같다”고 강조했다. 중국 당국의 식품유해요소중점관리(HACCP) 인증도 받았다. 하지만 성법인장은 회사이름이 알려지는 걸 무척 꺼렸다. 중국 공장이 있다는 게 널리 알려지면 한국에서 파는 김치에 중국산이 있다는 오해가 생겨 판매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성법인장은 “중국 내수와 유럽 등 제3국 수출용으로만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수입업자 가격만 관심’그는 “영국에서 현지 교민이 운영하는 경쟁업체가 ‘중국산’을 확인하라는 전단까지 만들어 뿌리고 있다”며 “중국산을 싸잡아 매도하는 분위기는 자제돼야 한다”고 호소했다.베이징의 통저우 식품개발공단에서 김치공장을 운영하는 ‘베이징 하선정 종합식품’의 박태성 대표도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한국에는 수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중국에서 일정 수준의 외형을 갖춘 김치공장을 운영하는 한국업체들은 김치 파동의 원인을 영세업체에 수출 허가업체 명의를 빌려주거나 재하청을 주는 정식 수출업체들의 불법행위 및 한국 수입업자의 가격 후려치기에서 찾고 있다.최근 칭다오시는 23개 김치 수출업체 관계자를 소집해 이 같은 불법행위가 적발되면 영업정지 조치를 내리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김치 수출업체들은 중국 정부가 요구하는 위생수준을 갖추면 t당 500달러가 채산성의 마지노선인데 t당 400달러대까지 요구하는 한국 수입업자의 요구를 맞추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한 김치공장 관계자는 “한국 수입업자는 가격에만 관심을 쏟을 뿐 공장 위생관리에는 소홀히 하는 반면, 일본 수입업자는 위생수준부터 따지고 상주하다시피하면서 간섭을 한다”며 “수입업자가 1차 검역기능을 못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중국에서 위생시설을 잘 갖춘 김치 수출업체 일각에서는 중국산 김치 파동 탓에 당장은 힘이 들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불량 수출업체들이 정리되고 김치가격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순기능을 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고 있다. 이번 김치 파동이 중국의 김치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중국 검역당국은 칭다오 등지의 김치 수출업체를 상대로 검역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번 조사에서 탈락된 업체들은 수출허가권이 취소될 전망이다.중국에서 원래 김치생산은 조선족이 주도했었다. 길엽(吉葉), 영생(靈生) 등이 대표적인 조선족 김치다. 그러나 최근 수년 사이에 한국기업들이 잇따라 뛰어들고 심지어 북한 김치공장까지 밀려들면서 김치 생산기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한국기업들도 초기에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이 세운 김치공장에 하청을 줬지만 지난해 두산과 하선정 김치가 베이징에서 직접 공장을 가동하는 등 대기업들의 진출도 늘고 있다. 일본자본의 진출도 적잖아 중국 언론에서는 중국 내 김치공장의 90%가 한국 및 일본이 투자한 기업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베이징의 상수원이 있는 동북쪽 미윈구에 공장을 운영 중인 두산의 종가집 김치는 돈 많은 중국인이 모이는 일본 미쓰이그룹 계열 백화점인 화탕과 신스제, 로손과 함께 대형 슈퍼체인인 징커롱 이커롱 등에 김치를 공급하고 있다.김치생산이 이처럼 활발해진 것은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태를 계기로 사스예방 효험이 있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김치가 인기를 끈데다 중국 내 한국인이 5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진출 일부 한국기업들은 지난 춘절(설날) 때 중국측 파트너에 김치를 선물로 보내 호평을 받을 만큼 김치 인지도가 중국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이 틈을 타서 중국시장을 겨냥한 북한 김치 공략도 빨라지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1호 북한 김치는 해당화김치로, 10년 전 베이징에서 문을 연 해당화식당과 함께 진출했다. 베이징 서남부 펑타이구에 공장이 있는 해당화김치는 연간 600여t의 김치를 생산, 일본에까지 수출하고 있다. 해당화식당에서는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선물용 김치까지 만들어 판다. 해당화김치는 캔핀스키호텔 등 베이징의 일부 호텔에도 공급하고 있다.묘향산김치는 산둥성 칭다오에 공장을 두고 베이징, 칭다오, 톈진, 옌타이 등 한국교민과 재중동포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묘향산김치의 한 관계자는 “조선고려호텔 임직원과 조선과학원 식료연구소 연구원이 직접 파견돼 김치를 만들고 있다”며 “품질에 관한 한 최고임을 자신한다”고 말했다.이처럼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한 김치경쟁이 가열되고 있지만 시장 자체는 이제 첫걸음을 뗀 수준이라는 게 현지 진출 김치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따라서 중국의 김치공장 상당수는 내수시장보다 주로 일본과 한국 등 해외시장을 겨냥한 저렴한 김치 생산수출기지로서 각광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배추를 구하기가 쉽고 물 좋은 산둥성에 몰려 있는 김치 생산업체들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만 김치를 생산하는 곳이 150곳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한국자본이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 일본 등 해외를 겨냥한 수출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이 때문에 중국 언론들은 최근 한ㆍ중간의 김치전쟁의 진상은 중국 김치에 종주국 위협을 받은 한국의 몸부림이라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한국 김치시장까지 중국산 김치에 자리를 내준 데 이어 한국산 김치의 주요 수출무대인 일본에서도 중국산 김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 일간지 는 최근 “일본에서 중국산 김치는 ㎏당 2.1달러인데 한국산 김치는 4.5달러로 차이가 많지만 맛이나 품질은 별 차이가 없다”며 중국산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했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