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지와 함께 한 33년 조사인생

197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국내 리서치 분야의 발전은 눈부시다. 비록 시작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크게 늦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최고 수준에 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기간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 결과다.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이사(58)가 돋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대표는 국내 리서치업계의 1세대이자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던 분야를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수준으로 키운 일등공신이다.노대표가 리서치 분야에 투신한 건 33년 전인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케팅 조사를 하고 있던 재단법인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가면서 인생항로가 정해졌다. 당시만 해도 마케팅 조사라는 용어 자체가 아주 낯설었고, 리서치 전문회사 역시 존재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국행동과학연구소에서 관련 조사를 맡고 있었다.노대표는 이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단 한번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적이 없다. 청춘을 송두리째 바치는 등 그야말로 33년간 한우물만 팠다. 75년 자리를 옮겨 외국계 조사회사인 ASI에 들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만뒀고, 이를 계기로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78년 지금의 한국리서치를 창업했다.“저를 포함해 단 둘이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저를 도왔던 여직원은 지금도 자료조사부 관리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참 질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죠. 창업자금이라고 해봐야 단돈 3만6,000원이었으니 회사라기보다는 개인 사무실에 가까웠죠.”당시 리서치 업무는 고스란히 노대표 몫이었다. 직원이라곤 달랑 여직원 한 명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기획부터 자료수집, 분석까지 혼자 하다시피 했다. 업무만 놓고 보면 1인 회사나 다름없었다.주 고객은 외국계 회사였다. 펩시콜라, 질레트, 몬산토 등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이 본사에서 무엇을 들여와 팔아야 할지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해 왔던 것. 노대표는 “육체적으로는 무척 힘들었지만 뛰어다니며 고객을 유치하고 조사결과에 대한 대가를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며 초창기를 회고했다.노대표는 학창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당대 최고의 명문고인 경기고를 나와 고려대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는 쉽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리서치 분야에 뛰어들었다. 주변에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리서치 분야에 큰 매력을 느꼈어요. 또 졸업 후 한국행동과학연구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적성에도 딱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서치는 업무 특성상 학문적, 기자적, 영업적 성격이 골고루 포함돼 있기 때문이죠. 꾸준히 공부를 해야 하고(학문적), 자료수집을 잘 해야(기자적)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여기에다 영업적 마인드가 없으면 회사를 꾸려나갈 수가 없어요.”우리나라의 리서치 분야 발전은 공교롭게도 정치민주화와 궤를 같이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가 기업들을 철저하게 통제, 자유경쟁체제가 자리잡지 못했다. 예컨대 치약만 해도 한 회사에서만 만들게 할 정도였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부분이 독점생산이니 굳이 마케팅 조사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리서치산업 자체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창기 노대표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다.노대표가 이끌어온 한국리서치의 역사는 ‘창조와 변화의 연속’으로 요약된다. 외국계 회사에만 의존하다 81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클라이언트들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어 84년에 고객별 3개 조사팀을 운영하고, 전화면접실을 개설했다. 85~86년에는 자료조사부를 신설하고 조사유형을 개발했고, 연구부와 전산실도 처음 선보였다. 조사업무에 PC를 처음 도입한 것도 86년이다. 이후에도 한국리서치는 기획조사 업무 개시, 지방사무소 개설, 광고효과 측정모델 도입, 식품소매 인덱스 시작, 여론조사팀 신설, 소비자 패널조사 개시 등 쉬지 않고 리서치 업무의 변화를 주도했다. 창업 이듬해 4,000만원이던 매출액은 지난해 220억원으로 500배 이상 늘었다.33년 외길을 걸어온 베테랑답게 노대표의 ‘조사론(論)’은 독특하다. 그는 조사의 생명은 ‘소비자에 대한 사랑과 동정(같이 느낌)’이라고 강조한다. 조사 대상인 소비자와 함께 느끼는 것이 없으면 진정한 조사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냥 기계적으로 묻고 답해서는 진정한 조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노대표는 “조사는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고도 말한다.그렇다고 그가 말만 앞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요즘도 걸어가다가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입해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좀 특이한 케이스를 보면 궁금증을 발산한다. 소비자의 마음을 읽고 그들과 의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다.“간혹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과자와 청량음료를 구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죠. 보통 ‘저 사람은 간식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저는 따라가서 정중하게 이유를 물어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 들어봐도 그렇습니다. 교회 어린이들에게 갖다 주려고 사가는 사람 등 매우 다양합니다. 리서치를 직접 하는 사람들은 선입견을 버리고 소비자들이 어떤 상품을, 왜 선택하는지의 이유를 파악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최근 들어 리서치의 파워가 커졌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현장에서 지휘하는 노대표 역시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노대표는 그 배경에 대해 다소 색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단순히 조사의 기능이 커지고 기업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점보다는 민심과 소비자의 파워가 세졌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요즘 노대표의 눈은 해외로 향한다. 국내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해외시장에 적극 진출한다는 구상이다. 다행히 국내기업이 해외시장 조사를 의뢰하는 경우가 많아 발걸음은 가볍다. 현지에서의 자료수집은 해당 지역 리서치회사가 맡고, 기획과 분석 등은 국내에서 이뤄진다. 최근 들어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적극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전세계 60개국에서 동시에 조사가 가능한 시스템도 짜놓고 있다.리서치회사는 업종의 특성상 통상 여직원이 전 직원의 절반을 넘는다. 여성의 꼼꼼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이다. 한국리서치도 마찬가지다. 일부 부서는 몇 명 빼고 전부 여성일 정도다. 노대표에게 혹시 여직원을 다루는 데 어려움은 없냐고 슬쩍 운을 뗐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여직원을 여자로 보고 다루면 무척 힘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고 편하게 대합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간혹 여직원에게 옷차림이 ‘괜찮다’, 아니면 ‘좀 그렇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해요. 우리 회사 부사장이 여자인데 이 사람은 남자직원들의 넥타이를 보고 뭐라 하기도 합니다.”그래서인지 사내에서 만나는 여직원들도 노대표를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부담 없이 말을 건네고 노대표 역시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 부서에서는 노대표가 들어서도 직원들이 일에만 몰두하고 쳐다보지도 않자 “사장이 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는다”며 약간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한 직원은 “우리 사장님의 최고 매력은 최고경영자지만 전혀 권위 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고 직원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직원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는 만큼 노대표는 원하는 것도 적지 않다. 특히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고 조사가치를 높여 회사의 가치를 올리자’(Continuously enhance your value, research value and company value)고 강조한다. 노대표는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남이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를 실천하다 보면 언젠가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인재로 거듭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약력: 1947년 서울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72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입사. 75년 ASI Market Research 수석연구원. 78년 한국리서치 설립(현 대표이사). 98년 한양대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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