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 안테나…마케팅 ‘핵’ 부상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1987년 12월16일 한국갤럽은 “노태우 후보가 약 34.4%의 득표율로 당선될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방송사, 신문사들은 “틀리면 어떻게 할 거냐”며 조사결과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례가 없는 정치 여론조사를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일본 NHK만이 오후 7시 뉴스에서 한국갤럽의 조사결과를 보도했을 뿐이었다.이윽고 개표가 끝나고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다. 갤럽의 조사는 ±2% 범위 내에서 득표율과 순위를 모두 맞혔기 때문이다. 위험천만하다며 외면당했던 ‘가설’은 하루 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족집게 예보’로 변신했다.이를 계기로 여론조사를 보는 사회의 시각이 확 달라졌다. 박무익 한국갤럽 소장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면서 그때를 회상했다. 그는 “과학적인 선거예측조사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난 뒤 통계에 바탕을 둔 정치 합리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도 통계 데이터에 의한 의사결정이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치나 기업 경영이나 주먹구구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이야기다.실제로 그랬다. 갤럽의 첫 선거예측조사가 적중한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 진척 정도를 알려주는 표시나 다름없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암울한 정치 탓에 ‘한국사람은 마음속 생각을 잘 말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지만 이 역시 보기 좋게 깨뜨렸다.또 민심을 알고 싶을 때 여론조사를 이용하는 게 정석으로 통하게 됐다. 그 누구도 조사를 거치지 않고 ‘여론이 이렇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리서치는 분야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정치ㆍ사회 분야에서 수시로 진행되는 여론조사의 경우 종종 정치나 정책의 흐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내 후보 경선 때부터 시시각각 달라지는 민심이 여론조사를 통해 반영되면서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대통령은 탄핵사태 이후에도 여론조사의 ‘덕’을 크게 봤다는 게 중론이다.또 핵폐기장 건립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의 해결고리로도 여론조사는 자주 활용된다. 부안 핵폐기장 건립 계획 철회 이후 대체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리서치는 ‘필수’로 활용되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 시청률조사의 경우 소수점 자리 하나로 울고 웃는 만큼 그 영향력이 방송계 전체로까지 미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특히 리서치는 비즈니스 서비스의 핵심분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제품 개발과 출시, 마케팅 전략 수립 등에 있어 적재적소에 활용되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리서치 파워를 접할 기회는 정치 관련 여론조사나 미디어 주도의 여론조사가 대부분이지만, 실제로는 마케팅 관련 분야에서의 활약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전체 매출의 80% 이상이 마케팅 관련 조사일 정도다.특히 생활용품, 자동차, 이동통신, 컴퓨터 등 브랜드 파워와 소비자 반응을 중시하는 소비재 기업은 갈수록 리서치 활용도를 높이는 추세다. 시장점유율 조사를 비롯, 브랜드 인지도 및 호감도 측정 조사, 신제품 반응 조사, 판매 및 서비스 측정 조사 등을 주로 활용한다. 조사방법도 과거 전화나 종이설문을 이용하던 데서 면접, 방문, 암행, 관찰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양적인 조사에서 질적인 조사로의 이행도 요즘 뚜렷해진 현상이다. 이상경 현대리서치 사장은 “조사결과의 활용이 무궁무진한 만큼 갈수록 수요가 늘고 있다”면서 “산업의 흐름에 따라 조사기법, 대상, 분석방법 등도 끊임없이 연구개발되는 추세”라고 말했다.리서치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대단히 넓다. 때에 따라 시장의 희비가 엇갈리고 장수 브랜드와 단종 브랜드가 결정되기도 한다. 시의 적절한 리서치로 마케팅 비용을 크게 아끼는가 하면, ‘쓸데없이’ 비용을 날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조사결과가 인사고과나 판매대리점 평가에 반영되는 사례도 적잖다. 리서치 적용범위가 넓어지면서 쓰임새도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한 생활용품업체의 사례를 보자. A사는 지난해 초 사장의 지시로 신제품 개발을 위한 태스크포스팀(TFT)을 만들고 3개월 이상 밤낮없이 시제품 개발에 매달린 후 리서치회사에 조사를 의뢰, 시장성을 타진했다. 하지만 조사결과는 한마디로 ‘꽝’이었다.3개월여 동안 들인 비용만 이미 수억원. 조사를 담당했던 한 리서처는 “기획에서부터 리서치를 접목했더라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사장의 지시라는 압박감에다 그때까지 들인 비용이 아까워 계속 신제품 출시를 강행했다가 결국 광고비 등 수백억원을 날리고 1년이 안돼 시장에서 철수했다”고 귀띔했다.이런 시행착오는 20여년 전에도 있었다. 지난 78년 진로는 ‘길벗’이라는 위스키 브랜드를 내놓았다. 경쟁사인 백화양조와 대결하면서 당시로선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뒤늦게 의뢰한 광고효과 측정조사 결과, 들인 비용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가 나왔다. 기업 내부에서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지만 실제 시장에서의 매출은 조사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가 길벗위스키는 추억 속으로 파묻히고 대규모 문책성 인사가 뒤따랐다.리서치의 영향력이 부각되면서 기업들은 앞다퉈 담당부서를 만드는 등 보다 적극적인 리서치 활용에 들어간 상태다. 또 국내시장을 넘어 해외시장 리서치로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최신애 한국리서치 부사장은 “수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해외시장 진출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접근하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면서 “과학적 의사결정을 통해 실패를 줄이려는 기업들은 대부분 리서치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한기룡 M&C리서치 사장도 “기업 경영의 합리성이 강조될수록 조사업계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조사에서 대안 제시로 고객사의 요구 수준이 높아진 것도 요즘 추세”라고 전했다.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사내에 조사 담당 부서나 담당자를 두고 적극적인 리서치 활동을 펴고 있다. LG생활건강의 경우 리서치 자료를 활용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특히 리서치 결과를 토대로 한 의사결정 지원 모델을 만들어 다른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CJ나 태평양, 풀무원, SK텔레콤 등도 시장조사 담당 부서를 운영한다. 삼성그룹은 글로벌마케팅연구소 내에 국제 마케팅 조사 파트를 두고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내외 시장을 조사하고 있다. 한기룡 M&C 사장은 “기업들은 크게 신제품 개발과 평가에 리서치 자료를 활용한다”고 밝히고 “아직 활용되지 않은 영역도 많아 당분간 시장규모와 영향력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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