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 털어 문화봉사…‘삶이 다르다’

한국의 박물관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국가가 설립ㆍ운영하는 국립박물관과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이 세운 공립박물관, 대학 부설 박물관, 그리고 개인이나 기업 등이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이 그것이다. 한국박물관협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406개 박물관 가운데 절반인 203개가 사립박물관이다. 문화재 수집ㆍ보존과 박물관 문화 보급에 사립박물관이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사립박물관 중에서도 기업, 종교재단 등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순수 개인이 운영하는 이른바 ‘개인 박물관’이 적잖다. 통계에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수집가 생활을 하며 모은 문화재 또는 물건으로 박물관을 꾸미는 경우가 사립박물관의 절반 가량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윤태석 한국박물관협회 기획지원실장은 “상당수 개인 박물관 설립자가 사재를 털어 의미 있는 물건이나 문화재, 작품을 수집한 뒤 문화봉사 차원에서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최근 들어 체험학습 등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 ‘열린 박물관’을 지향하는 곳이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박물관이 늘어나면서 딱딱하고 엄숙하게만 느껴지던 박물관이 편안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개인 박물관은 전국 곳곳에 분포돼 있다. 폐교를 활용해 자연 박물관을 만들거나 자신의 집 한쪽을 리모델링해 박물관으로 꾸미는 경우도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가회동, 평창동 등지는 ‘개인 박물관의 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2~3년 사이 다양한 종류의 개인 박물관이 들어서고 있다.개인 박물관은 한두 가지 테마를 설정해 특성화하는 게 특징이다. 옹기민속박물관, 울트라건축박물관, 한국가구박물관, 짚풀생활사박물관, 쇳대박물관, 떡부엌살림박물관, 영인문학관 등이 대표적이다. 근현대 서민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부터 문화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곳까지 테마가 다양하다.특히 외국여행이 보편화되고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는 이가 늘어나면서 귀중한 외국문물을 주제로 삼는 박물관이 늘어나고 있다. 중남미 문화재와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은 중남미문화원, 남미와 아프리카 장신구를 중심으로 한 세계장신구박물관, 티베트 의상과 문화재를 모은 티베트박물관 등은 소장품 수준과 구색이 외국의 유명 박물관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이다.개인 박물관 설립자는 대부분 수십년간 한 분야에 몰두, 수천점의 컬렉션을 자랑하게 된 이들이다. 김진규 티베트박물관 학예실장은 “처음 호기심과 취미로 시작한 수집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대중에 선보이고 싶은 생각과 보존의 문제 등이 맞물려 자연스레 박물관 설립을 꿈꾸게 된다”면서 “현재 개관한 개인 박물관 대부분이 수십년간의 꿈을 현실로 이룬 수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특히 외국문물을 주제로 개인 박물관을 설립한 이들은 수십년에 걸쳐 국내로 물건을 나른 색다른 경험을 갖고 있다. 요즘은 외국 문화재를 들여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70~80년대부터 수집을 시작한 덕에 수천점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한 개인 박물관 관장은 “작품이 손상될까 봐 품에 안고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하고 “하나하나 힘들게 수집해 들여온 만큼 애정이 남다르다”고 말했다.개인 박물관 설립자의 직업은 다양하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며 현지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외교관은 ‘가장 유리한’ 직업으로 꼽힌다. 중남미문화원의 이복형 원장, 세계장신구박물관의 이강원 관장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면서 현지 문물을 수집, 은퇴 후 박물관을 열었다.사회적인 사명감 또한 개인 박물관 설립자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 가운데 하나다. 문학인 부부로 잘 알려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가 설립한 영인문학관의 경우 유실되기 쉬운 작가와 문학에 관한 자료를 소장, ‘문학계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강인숙 교수는 “70~80년대 근대문학 난숙기의 자료를 많이 갖고 있는 것이 문학관의 자랑”이라고 밝히고 “가뭄에 타 죽어가는 벼 한포기라도 건지려는 농부의 심정으로 귀중한 자료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복형 중남미문화원장도 “박물관 설립을 마음먹었을 때부터 사회에 환원하기로 원칙을 정했다”면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물건이지만, 문화 향유자와 소유자는 온 국민”이라고 밝혔다.하지만 개인 박물관에 대한 사회지원과 정책 수준은 아직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어 많은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박물관 미술관 지원법이 만들어져 있지만, 지원보다는 의무에 대해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운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은 곳도 여럿이다. 신영수 티베트박물관 관장의 경우 최초의 성 박물관인 에로스박물관, 중국도자기박물관을 열었다가 운영난으로 자진 폐쇄한 바 있다. “입장료 수입만으로 박물관 운영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박물관 운영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현재 개인 박물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복권기금과 문예진흥기금이 전부다. 그나마 지난해부터 로또복권 수익금 일부로 지원되는 복권기금 덕에 일부 박물관의 도록 제작과 기획전시회 기획이 가능해진 상태다. 윤태석 실장은 “OECD 회원국 가운데 박물관 수가 가장 적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밝히고 “지원이 미약하다 보니 개인이 소장한 문화재에 대해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박물관의 교육적인 기능, 삶의 질을 추구하는 생활 패턴 변화 등을 감안해 개인 박물관에 대한 지원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는 의견이 적잖다.한국에 비해 박물관이 10배 많은 일본의 경우처럼 관광, 문화자원 확충 등의 관점에서 개인 박물관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배명희 부엉이박물관장은 “일본에는 대여섯평 공간에 꾸민 개인 박물관이 수없이 많다”면서 “규모는 작지만 이들 박물관이 문화기반시설로, 관광자원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박물관 관장도 “개인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며 방법을 묻는 문의가 적잖다”고 말하고 “공간 크기, 수장고 유무 등으로 박물관 기준을 잴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수집가가 좋은 문화를 선보이게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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