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갖고 대응논리 마련해야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UN의 유럽센터와 WTO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UN 세계질서가 모든 국가가 평등하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자는 평등적 세계질서와 관련이 있다면 WTO체제로 대표되는 현 통상체제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다. 무역장벽을 걷고 자유무역을 할 때 상당한 이익이 돌아오기도 하지만 현재 가난한 국가들은 하나같이 무역장벽을 원한다.그러나 이는 WTO제체하에서는 어림없는 얘기다. 무역장벽을 걷어내는 것이 WTO체제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빈곤한 국가들이 자국의 기업을 키워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산업화를 하려면 국내기업을 키워야 하고, 국내기업을 키우려면 일정기간 해당산업에 무역장벽을 쳐 놓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해외에서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이 수입되는 상황에서는 국내기업을 키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문제는 무역장벽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선진국들도 과거에는 해당산업에 무역장벽을 쳐놓고 자국의 기업을 키웠고, 기업들이 국제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산업화에 성공을 하고, 결국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거쳤다.이렇게 보면 결국 어떤 나라가 잘사는가, 못사는가의 구별은 좋은 기업, 국제경쟁력이 있는 기업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고 좋은 기업이 많고 부가가치를 많이 창출하는 국가는 선진국의 대열에서 여유롭게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도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절묘한 시기에 절묘하게 이뤄졌다. 미국이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자본주의 진영으로 들어온 국가에는 무역장벽을 상당부분 용인해주면서 우리나라는 무역장벽을 쳐놓고 국내기업을 키워내는 압축성장을 함으로써 중진국 내지 준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를 바꿔 말하면 현재 한국경제가 한번 뒤처지면 회복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도 된다. 무역장벽이 거의 없는 지금 한국의 산업기반이 한번 약화되면 이를 회복할 기회도 없이 외국기업과 산업에 의해 잠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등이 다시 경제회복과 경기활성화를 즐기는 이 시기에 한국경제의 경쟁력 기반은 급속도로 와해돼 가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기업의 투자가 예전 같지 않고 경쟁력도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성장률은 3%대에 머물 가능성마저 있다. 한국경제가 이대로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이러한 한국기업의 부진에는 반기업정서가 도사리고 있다. 사실 반기업정서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에 걸맞지 않게 기업을 보는 눈이 차갑기만 하다. 1960년 약 80달러이던 1인당 GDP가 45년 만에 1만4,000달러를 기록하는 데 주역을 한 소중한 자산인 기업들을 여러가지 이유로 남의 자식처럼 취급하고 있다. 그중에 으뜸은 역시 정경유착이라는 부패고리와 연결된 부정적 이미지다. 사실 부패를 보는 시각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부의 규제문제와 연결돼 있다.관료들은 대체로 무언가 금지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각종 규정들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요건들, 바꿔 말하면 무언가가 안되는 이유들을 곳곳에 잘 포진시켜 놓았다. 소위 ‘적색 테이프’(Red Tape) 조항들이다. 이 적색 테이프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때로는 법률에서, 때로는 시행령에서 이러한 금지조항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조항이 관료들에 의해 쉽게 도입이 가능한 것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법률이 가진 문제점에 있다. 많은 법률들이 골격만 갖추어진 가건물같이 만들어진다. 중요한 부분에 가면 대부분 하위규정에서 정한다는 조항이 매우 많다.법률제정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일단 통과되고 나면 만들어지는 하위규정은 관료들의 몫이다. 법률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법률을 만들다 보니 관료들이 만든 법에서 중요 권한이 하위규정에 위임되는 것은 행정 편의를 위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곳곳에 적색 테이프들이 포진되고 이를 활용해 각종 인허가를 좌지우지하면서 관료들은 자신의 재량권을 극대화시킨다.정치권은 어떤가. 평소에는 자신이 할일(입법)을 상당부분 행정부에 미뤄 놓고 관료들이 권한을 극대화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다. 정치권이 부지런하게 입법을 해서 모든 조항이 투명한 상태에서 법이 통과되면 그 누구에게도 재량권 없이 상대적으로 투명한 법집행이 가능할 수도 있는데, 반대로 일을 게을리 해서 관료들이 재량권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방치해 놓으면 관료를 통한 간접적 재량권이 상당부분 창출된다. 국정감사와 인사문제 개입 등의 수단을 통해 관료들을 움직이면 적색 테이프가 걷히고 안된다고 하던 일들이 풀려간다. 관료들의 힘이 셀수록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정치권의 힘도 막강해진다. 정치권과 행정부간에 미묘한 욕망의 이중적 일치가 성립하는 것이다.기업들이 신규사업에 진출하고, 공장을 증설하고, 투자를 확대하려면 항상 부딪히는 것이 도처에 깔린 적색 테이프들이다.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적색 테이프가 걷히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불확실하다. 시일이 걸리고 무엇보다 기다려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관료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정치권을 이용한 간접적 접근이다. 항상 돈에 목말라하는 이들 정치권을 통해 적색 테이프를 제거하면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투자의 불확실성이 줄어든다.결국 기업들은 이 편한 게임의 룰에 스스로 적응해간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음습한 정치자금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관료들은 적색 테이프를 계속 생산해내면서 힘을 발휘하고, 정치권은 기업에 적색 테이프의 제거를 약속하며 유혹하다가 머뭇거리면 위협까지 하고, 결국 먹이사슬의 맨아래에 있는 기업들은 자금을 제공하며 생태계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향후 중요한 과제는 부패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물론 정치권과 행정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행정이 투명해지고 규제가 완화되고 가결ㆍ부결 이유가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나아가 국회가 제 기능을 하면서 의원입법이 많아지고 중요 조항이 하위규정에 위임되지 않고 상위법률에서 분명하게 정의돼 재량권을 발동할 소지가 없이 모든 룰이 미리 투명하게 정의돼야 한다. 이런 환경하에서라면 정치자금의 생태계는 알아서 파괴된다. 주고받는 경우가 줄어들고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알아서 투명해지고 깨끗해진다. 공격받을 일도 사라지고 부정적 인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해소되는 것이다.나아가 소위 재벌체제에 대한 반감도 반기업정서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인해 소유구조와 지배구조문제가 부각되는 바람에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지기는 했으나 이 체제는 장점도 상당하다. 소유지배구조에는 결코 정답이 없고 국가와 사회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체제가 공존함을 부각시키면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과정이 기업이 없이는 불가능했고 이 체제가 미션 임파서블을 가능하게 한 한 체제임을 부각시키고 기업의 소중함을 일깨운다면 부정적 인식은 상당부분 누그러질 것이다.결국 기업들이 부정적 인식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으므로 이제부터라도 기업들이 힘을 합해 자신감을 갖고 대응논리를 마련하고 총수경영, 계열경영, 가족경영으로 인해 공격을 받는 체제가 상당한 장점이 있음을 홍보하면서 드러난 부작용을 치유하고 개선해 나간다면 반기업정서는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획기적인 규제완화와 관료 및 정치권의 개혁이 이뤄지고 기업이 서로 힘을 합친 상태에서 효과적인 홍보와 대응논리 개발이 이루어지되 특히 아직도 80년대의 종속이론과 매판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부 국민들을 위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자유주의적 이념을 정리해 전파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반기업정서의 불식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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