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반대는 ‘국부 갉아먹기’

“한국 정부는 평등주의의 함정에 빠져 세상 이치를 거슬러가고 있어요. 잘 나가는 사람ㆍ기업을 잡으면 망합니다. 수직적 사다리를 만들어야죠. 경제적 차별을 통해 스스로 돕는 자가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도록 도와야 해요. 그런데 열심히 하는 사람ㆍ기업을 거꾸로 끌어내리겠다는 건 경제ㆍ사회적 역동성을 죽이는 거예요. 질시에 휩싸인 반기업ㆍ부자 정서가 한국경제를 망쳤죠.” (좌승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ㆍ전 한국경제연구원장)“내수불황 속에 일부 기업의 눈부신 약진이 그나마 한국경제를 지탱해 왔어요. 한국경제는 희망과 낙관의 상실이란 점에서 분명 위기에요. 경영권 위협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대기업의 요구에 ‘문제없다’는 답이 고작이에요. 나라를 책임지는 사람들의 기업관은 조령모개(朝令暮改)에 ‘갈 지(之)’자뿐이죠. 믿음과 신뢰상실은 투자부진을 낳을 수밖에요. 이게 계속되면 소비ㆍ투자마인드 회복은 가능성이 없어 보이네요.”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요즘 증권가 핫이슈 중 하나는 비상장기업의 상장 가능성 타진 여부다. 사상 초유의 종합주가지수 1200선 돌파에 힘입어 상장을 권하는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생보사 상장이 도마에 오르더니 이제는 상장 스케줄이 없는 공기업의 민영화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정부도 몇몇 상장 걸림돌을 없애주겠다고 힘을 싣는다. 활황 장세를 상장기업 유치 확대로 확산시킬 속내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상장하기 딱 좋은 시절인 셈. 하지만 정작 공을 넘겨받은 기업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가만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굳이 기업공개를 왜 하냐”며 “정부 간섭과 반기업정서를 걱정하는 피해의식이 상당하다”고 전했다.반기업정서에 대한 우려감이 높다. 건설적인 비판을 넘어 감정적으로 싸잡아 매도하려는 움직임까지 일부 목격된다. 진원지는 정치권이다. 올해 재경위 국감의 최대 이슈는 ‘반기업정서’란 단어로 요약됨직하다. 반기업정서의 존재 여부에 대한 공방도 뜨겁다. 대통령까지 나서 “반기업정서는 없다”고 발언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는 분위기다. 지난 9월 말 자유시민연대는 성명을 통해 “우리 사회의 유별난 반기업정서가 문제”라며 “일부 시민단체와 이들에 편승한 정치권의 기업인 때리기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고 우려했다. 물론 반론도 만만찮다. 반기업정서를 운운하는 게 또 다른 형태의 여론몰이라는 지적이 대표적이다.몰매는 삼성그룹이 맞았다. X파일사건에 이어 경영권 변칙승계까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반기업정서가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이다. 일각에선 삼성의 위기가 이제는 재계 전체 위기로 확산됐다고 인식한다. 실제로 반기업정서는 다양한 결과로 나타났다. 처벌을 받았고 공소시효마저 지난 X파일사건을 재차 문제로 삼을 정도다. 한수 더 떠 국회에선 재벌총수 체포조 결성 얘기까지 나올 판이다. 기업인에 대한 무분별한 국감 출석 요구도 마찬가지다. 반기업적 발언은 박수를 받지만 친기업적 논리에는 뭔가 혜택이나 뒷거래가 있었다고 색안경을 끼는 것도 반기업정서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재계는 참여정부의 일부 좌파인사ㆍ시민단체에 머물러 있던 반기업정서가 상당수 국민에게까지 맹목적으로 전염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반기업정서의 후폭풍은 메가톤급이다. 1차 타격이야 해당기업ㆍ재계가 직접 받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경제 전체가 후속타를 감내해야 한다. 기업은 다양하고 광범위한 역할을 맡는다. 이윤을 창출하고 벌어들인 부가가치를 사회에 적극 환원하는 게 대표적이다. 기업이 국민ㆍ국가를 먹여 살린다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반기업정서는 이 작동원리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정서만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현실장벽으로 연결된다. 적극적인 기업활동에 악재일 수밖에 없다. 김용열 홍익대 상경대 교수는 “좋은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예쁘게 봐주지 않지만 어쩌다 나쁜 일을 하면 죽일 놈 취급을 받는다”며 “반기업정서는 규제 강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반기업정서는 기업의 일할 맛을 없앤다. 이른바 ‘기업가정신’의 실종이다. 기업을 백안시하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의욕과 혁신 추구는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성장동력 부재를 낳은 한국경제의 조루증은 기업가정신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다. 반기업정서는 또 각종 규제로 체화된다. 출자제한ㆍ사업분야 규제ㆍ특정 지배구조 강요ㆍ수도권 공장 신축제한 등은 대기업이기 때문에 맞닥뜨려야 할 규제다. 그렇다고 힘의 평준화 정책에 수혜를 입은 중소기업 상황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반기업정서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국가간섭의 폐해는 고스란히 국부감소로 직결된다.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찬다는 말도 빈말은 아니다.국부창출의 원동력은 사실상 기업에 있다. 최근 한국의 대표기업(삼성전자ㆍKTㆍ포스코 등) 10개사가 한국 국민 383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100대 기업으로 폭을 넓히면 무려 811만명에 달한다. 온 국민이 한해에 벌어들인 소득의 6분의 1을 100대 기업이 창출(부가가치)한다는 얘기다. 일자리 창출능력도 탁월하다. 삼성전자(6만명)와 현대차(5만1,000명)는 현재 고용 중인 임직원 규모만 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산업연관 유발효과까지 감안하면 10만명을 훌쩍 넘긴다. 1~2차 납품업체를 포함하면 수십만명이다. 가령 현대ㆍ기아차를 보자. 1차(420개사ㆍ20만명) 및 2차(3,000여개사ㆍ23만명) 협력업체와 여기에 부품ㆍ원자재를 공급하는 업체(1,300여개사ㆍ6만여명)까지 합하면 얼추 60만명이 현대ㆍ기아차와 공동운명체다.반기업정서의 확산은 제조업 공동화(생산현장의 해외이전)를 낳는다. 실제로 기업하기 힘든 상황 조성은 제조업 공동화의 유력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토종기업의 탈한국 움직임은 기우가 아니다. 올 상반기 국내 제조업체의 해외투자(19억2,100만달러)는 외국기업의 국내투자(11억5,900만달러)보다 66%나 더 많은 규모다. 공장이전에 따라 유휴설비를 팔겠다고 내놓은 제조업체도 부지기수다. 이 결과 제조업체 취업자와 생산능력도 감소 추세다.반면 활발한 기업활동은 국가ㆍ지역경제 활성화의 절대변수다. 대한상공회의소의 통계에 따르면 기업이 1개 늘면 취업자 73명에 산업생산액이 77억원 증가한다. 손영기 대한상의 경제조사팀장은 “기업이 크게 증가한 지역일수록 지역경제에의 성장 기여도가 높다”며 “기업이 튼튼히 뿌리내리기 위해선 지역주민ㆍ지자체의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확산과 애정이 전제돼야 한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반기업정서는 해소 1순위 과제다. 규제철폐ㆍ세제혜택 못지않게 중대한 이슈다. ‘반기업정서 → 공장이전 → 실업증가 → 가계수입 감소’의 악순환은 서민경제에 직격탄을 날린다.반기업정서는 해외자본의 국내유치도 방해한다. 가령 한국에 진출한 지 올해로 21년째인 세계적 블록완구업체 레고가 최근 한국공장 철수를 결정했다. 발기부전치료제인 시알리스를 생산하는 한국릴리도 국내공장을 매각했다. 생산기지로서의 한국공장 메리트가 사라진 데는 고임금과 함께 반기업정서도 한몫 했다. 다카스기 노부야 서울재팬클럽 회장은 “한국의 노동정책이 지나치게 노조 편향적이며 노사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외자유치정책은 헛구호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최근 방한한 레스터 서로우 MIT대 교수는 “중국 정부조차 외자유치를 위해 중국을 기업하기 좋은 국가로 바꿔가고 있다”며 “한국은 중국에서 생존힌트를 얻어야 한다”고 저서(부의 지배)에서 밝혔다.반기업정서는 궁극적으로 국제경쟁력 및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린다. 신용평가사들은 한국 특유의 노동시장 경직성과 과격한 노조를 경제성장의 위협요소로 인식한다. 국가신인도가 올라가지 않는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IMD 국제경쟁력 순위(2004년)에선 100점 만점에 62점을 얻어 52개국 중 31위에 그쳤다. 중국(70.7점)만 해도 22위다. 경제자유도(2002년)는 10점 만점에 7.1점으로 123개국 중 31위에 머물렀다. 반면 개별기업 성적표는 국가보다 더 낫다. 의 세계 500대 기업(2004년)에는 11개사가 랭크돼 종합 9위에 올랐다.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다. 국가파워는 이제 군사력이 아닌 초일류기업의 숫자에 달렸다.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상의 문제는 경영성과로 우열을 가릴 수밖에 없어 그 판단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좋은 지배구조는 좋은 성과를 내는 경영”이라고 말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반기업정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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