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가전 돌풍… 우리가 ‘졸’이라고?

지난 7월 말 한 TV홈쇼핑에서는 이름도 낯선 중국 가전업체의 에어컨이 1시간 동안 1,000대 넘게 팔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7월22일 저녁시간대에 우리홈쇼핑을 통해 전파를 탄 하이얼(Haier) 에어컨은 4평형(29만9,000원) 151대, 6평형(35만8,000원) 737대, 10평형(49만8,000원) 234대 등 총 1,122대가 팔려 매출액이 3억8,098만원에 이르렀다.하이얼 에어컨 판매를 기획한 양진선 우리홈쇼핑 디지털가전팀 과장은 “지난 6월 말 이틀간 방송 판매한 한국산 스탠드형 에어컨 판매물량이 1시간 동안 300~400대인 것과 비교할 때 하이얼 에어컨이 저가의 룸에어컨인 점을 감안해도 1시간 동안 1,100대가 넘게 팔린 것은 예상외의 ‘대박’이었다”고 말했다.6월 말부터 하이얼과 업무제휴를 맺은 우리홈쇼핑은 이 제품의 방송ㆍ판매를 긴급 추가 편성하면서 하이얼 에어컨은 총 8회 방송에 약 5,000대가 팔려 2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현재 한국 가전시장은 LG, 삼성 등 토종업체가 좌지우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드인 차이나’(Made in China) 제품을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 생산된 다양한 제품이 OEM 형태로 이미 많은 한국 가정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여름 하이얼 제품의 ‘홈쇼핑 대박 스토리’가 눈길을 끈 것은 중국 브랜드를 달고 판매됐기 때문이다.지난해 5월 한국법인 ‘하이얼코리아’를 세운 하이얼은 중국의 대표 토종 가전업체로 2004년 세계경제포럼(WEF)과 월드브랜드(WBL)가 실시한 조사에서 중국 500대 브랜드 가운데 1위를 차지한 바 있다.이 업체는 96개 카테고리에서 1만5,100여가지의 제품을 생산하는 종합가전 메이커로 해외에 13개 생산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중국기업으로는 최초로 냉장고 생산공장을 세웠으며 미국 중소형 냉장고 부문에서 시장점유율 60%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하이얼은 현재 한국에서는 TV홈쇼핑 이외에 롯데마트 등 일부 할인매장과 와인전문점 등에서 에어컨과 소형 냉장고ㆍ세탁기, 와인셀러 등 저가형 제품 위주로 판매하고 있다. 고가의 프리미엄군이 강화되고 있는 한국 가전업체와의 차별화를 위해 이 같은 제품 위주로 우선 선보였던 것. 일종의 틈새시장을 노린 전략이다.하이얼, 광고마케팅 강화실제 에어컨으로 대박을 터뜨린 우리홈쇼핑에서도 하이얼의 틈새전략 때문에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홈쇼핑 관계자는 “국내 에어컨 제조업체가 슬림형(스탠드형) 에어컨 사업에 주력해 룸에어컨 분야는 일종의 틈새시장이라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TV홈쇼핑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하이얼은 에어컨의 경우 올 여름 3만대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하지만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하이얼 제품에 대한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현재 하이얼 제품은 대형 할인점 1위 업체 신세계 이마트에 입점돼 있지 않다.2003년 초에 한국 연락사무소를 연 뒤 지난해 법인 형태로 재진출한 하이얼의 제품은 2003년에도 신세계 이마트에서 판매된 적이 있다. 이마트측에서는 당시 매출실적이 저조했다는 이유로 재입점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마트 상품본부장을 맡고 있는 홍춘섭 부사장은 지난 6월 이마트 중소기업박람회에서 “아직 국내에서는 품질도 좋고 무엇보다 애프터서비스(AS)가 확실하기 때문에 삼성이나 LG 등 대형 가전사들의 브랜드 파워가 막강하다”면서 “중국가전 판매는 AS부문이 해결되면 그 이후에 판매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이에 대해 이마트의 한 관계자는 “할인점은 기본적으로 질 좋고 싼 물건을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중국가전의 경우 고객반응이 워낙 신통치 않아 입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전문가들도 아직은 중국 가전업체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배영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국 가전유통은 폐쇄적인 경향이 강해 중국가전의 경우 핵심적인 유통망을 뚫지 못하고 있다”면서 “가격만으로 한국 소비자를 공략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유통망 확충과 함께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지 못하면 단기간에 위협할 만한 존재로 떠오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 하이얼은 AS라인을 보강하고 광고마케팅을 늘리는 등 브랜드 강화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모습이다. 하이얼은 지난 여름 이후 전국 50개 개인가전서비스업체와 AS 계약을 맺고 콜센터 격인 ‘하이진’을 운영 중이다.하이얼에 이어 한국 가전시장 연착륙에 도전하는 업체는 세계적인 PC업체 레노버다. 중국 최대 컴퓨터업체인 레노버(聯想ㆍ렌샹)그룹은 지난해 IBM PC사업부문을 인수했다. 따라서 지난 5월 초 설립된 레노버코리아도 한국IBM의 PC사업팀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한국시장에 진출했다.업계에서는 하이얼에 비해 오히려 레노버가 한국에서 쉽게 정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레노버코리아는 당분간 IBM 제품만으로 라인업을 구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중국 자사 브랜드 대신 IBM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성공적으로 PC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해서 고가 노트북 시장에서 승부를 낸 후 레노버의 전략제품인 저가 PC시장을 노린다는 것. 이밖에도 아직 한국법인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다리미, 가습기 등 메이디(美的ㆍMidea) 브랜드의 소형 가전제품들이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다.그렇다면 이처럼 판매, 유통 등 한국 가전업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성과를 나타내고 있는 중국 가전업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대답은 ‘Yes’다. 실제 법인 설립 1년을 조금 넘긴 하이얼에 한국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와인셀러를 전략상품으로 내세워 한국시장의 문을 두드린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하이얼은 1만5,000여개의 제품을 보유하고 있는 특징을 바탕으로 틈새시장에서 강세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한국 가전업체들이 점차 프리미엄 제품군을 강화하는 추세여서 중가 제품군의 층이 얇아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제품군에서 중국 가전업체들이 강세를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아직까지 ‘저가’의 브랜드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AS부문에서 한국업체들에 비해 약하지만 가격경쟁력을 갖고 있는 만큼 브랜드 전략이 강화되면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반응이다.이미 하이얼측에서는 올해 말과 내년 초에 걸쳐 노트북 등 고가의 IT제품 위주의 판매ㆍ마케팅전략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INTERVIEW 이광수 하이얼코리아 마케팅 차장‘만만디 전략 구사… 천천히 움직일 터’“이미 국내에서 팔리는 소형가전은 70~80%가 ‘메이드인 차이나’ 제품입니다. 하지만 고객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죠. 그게 바로 중국업체의 스타일입니다.”세계적인 위상에 비해 하이얼이 한국에서 유독 제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이광수 하이얼코리아 마케팅 차장은 “스펀지 전략”이라는 말로 일축했다.“금전적 이익만 추구하는 전략이라면 처음부터 물량으로 승부했을 겁니다. 중국 가전시장은 아직 포화상태가 아닙니다. 거대한 중국시장을 두고 굳이 한국시장에 전력을 다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따라서 그는 소수의 업체가 시장을 주도하는 한국 가전시장은 틈새시장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틈새를 서서히 파고드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가 에어컨이나 와인셀러로 브랜드를 알리기 시작한 게 이 같은 이유에서라는 것. 한국 가전시장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그는 금전적인 이유보다 “테스트베드로서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하이얼은 글로벌 기업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IT 수준이 높고 소비자가 까다로운 한국은 마케팅 전초기지 역할을 합니다.”한국시장에 대한 도전은 결국 ‘선난후이’(先難後異), 즉 선진시장에서 1등 브랜드가 되면 글로벌 브랜드가 되고 결국 개발도상국에서도 1등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의 하이얼 글로벌시장 진출전략과 일맥상통하는 셈이다.“과거에 일본 가전업체가 15년 걸렸던 과정을 한국업체는 7~8년 만에 끝냈죠. 그리고 중국 가전업체는 이를 3~4년으로 앞당길 겁니다.”이차장은 “하이얼은 중국 특유의 ‘만만디’ 정신으로 시장상황을 여유롭게 본다”면서 “한국 가전시장 내 마케팅의 성과와 진행상황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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