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승부걸자’ 잰걸음

사업다각화·자기만족·취미 등 이유 다양 … 시장규모 계속 확대

외식업은 명실상부한 인기업종이다. 지난 1992년 이선용 아시안스타 사장이 TGI프라이데이스(이하 TGIF)를 국내에 들여와 패밀리 레스토랑 전성시대를 연 이후 뚜렷해진 현상이다. 2000년대 들어선 개인자산가, 제조업체, 그룹사를 막론하고 저마다 외식업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움직임이다.제조업을 기반으로 삼는 기업은 더욱 그렇다. 중국 등지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국내에서 새로운 사업기반을 일궈야 하는 상황에서 외식업은 단골 아이템으로 꼽힌다. 다른 업종에 비해 쉽게 시작할 수 있고, 소비자 접점 업종으로 고객 변화를 민감하게 캐치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2년 전 미국의 외식 브랜드를 한국시장에 런칭한 한 제조업체 CEO는 “현금 보유력은 강하지만 설비나 부동산 등에 투자할 여건이 안되는 제조업체들이 업종전환을 모색하면서 주로 외식업에 주목하곤 한다”면서 “3차산업으로 업종을 전환하고 기업을 브랜드화해야 한다는 당면 과제에서 가장 적합한 대상 또한 외식업”이라고 밝혔다.특히 국내에 진출하지 않은 외국 브랜드, 경쟁상대가 비교적 적은 블루오션 업종은 사업권 경쟁이 치열하다. ‘한국진출을 검토하는 거의 모든 미국 브랜드에 복수경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지난해 12월 런칭한 크리스피크림도넛의 경우 2003년부터 코오롱 이웅렬 회장과 롯데 신동빈 부회장이 격전을 치른 끝에 롯데에 ‘낙찰’됐다. 업계에서는 ‘CEO들이 본사를 방문하는 등 치열한 경쟁을 벌인 탓에 로열티가 천정부지로 솟았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일반서민보다 외국문물을 자주 접하는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도 외식업을 선호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자신의 관심사를 사업으로 연결, 재미를 가미한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창업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자기만족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 실제 사업이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2세들의 외식업 사랑=TGIF 이후 재벌2세들의 외식업 진출은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났다. 이재연 전 LG카드 부회장과 구자혜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차녀 사이의 장남인 이선용 사장은 지난 2002년 TGIF를 롯데에 매각하기까지 10년 동안 시장을 평정하며 탁월한 경영능력을 입증했다. 그는 현재 이탈로니아라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사업에 집중하며 또 다른 돌풍을 모색 중이다.‘외식업계 여걸’로 통하는 남수정 썬앳푸드 사장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충우 타워호텔 회장의 장녀인 남사장은 유학 중에 토니로마스 브랜드를 접하고 귀국 후인 95년 서울 압구정동에 1호점을 개설했다. 이후 스파게띠아, 매드포갈릭, 페퍼런치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컨셉의 외식 브랜드를 런칭,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미세스마이, 사까나야를 운영하는 홍명식 사장처럼 다른 전문직에서 외식업으로 진로를 변경한 케이스도 있다. 남양유업 홍두영 창업주의 막내아들인 홍사장은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외환딜러로 일하다 지난 2000년 외식업에 뛰어들었다. 창업에 앞서 베트남 쌀국수를 배우기 위해 LA의 식당 주방에서 몇 달 동안 조리 수련을 거칠 만큼 열정적으로 준비했다.경인전자 김효조 회장의 장남인 김성완 스무디즈코리아 사장도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와 유학시절 즐겨 마신 스무디를 국내에 들여왔다. 그는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외식업에 진출했다”면서 “시장성이 풍부한 아이템인 만큼 앞으로 음료 프랜차이즈 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이우정 불스원 사장은 외식사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CEO로 유명하다. 임원시절부터 외식사업부를 따로 두고 중국만두 소롱포 전문점 난시앙과 스파게티 전문점 삐에뜨로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동양제철화학그룹 이수영 회장의 차남으로 외식업체 오픈시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오픈 후에는 직접 고객접대에 나서곤 한다.이밖에도 베니건스와 미스터차우를 운영하는 이화경 롸이즈온 사장, 카후나빌을 운영하는 조현식 사보이호텔 사장 등도 외식업에 집중하는 2세 CEO로 손꼽힌다.◇청담동 레스토랑 빅뱅=“그들에게 음식은 중대한 화두다. ‘나만의 퀴진(주방ㆍcuisine)’을 갖고 싶어 하는 이들이 앞다퉈 외식업에 뛰어들고 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 이를 보여주려는 욕구가 버무려져 부자들의 외식업 창업이 늘어나는 것이다.”한 레스토랑 컨설턴트가 진단하는 상류층 외식업 열풍의 배경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를 중심으로 고급 레스토랑이 크게 늘었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독특한 메뉴구성을 앞세운 레스토랑의 창업자는 십중팔구 든든한 재력을 가진 20~40대 젊은 부자들.레스토랑 컨설턴트 A씨는 “유학, 외국생활을 통해 다른 문화를 접한 이들은 자신의 남다른 미각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면서 “재미있는 사업,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에 착안해 레스토랑 사업을 선호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예전에는 물질로 신분을 나타냈지만 이제는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신분을 보여주는 시대가 된 만큼, 시각효과가 강한 레스토랑 사업이 각광받는다는 것이다.하지만 ‘쉽게 접근해 오래 가는 경우가 없다’는 게 청담동의 법칙이기도 하다. 청담동에서 유기농 누들바 호면당을 운영하고 있는 펀드매니저 출신의 이정학 리앤코 회장은 “취미로 음식점을 시작해서 1년 이상 버틴 경우를 보지 못했다”면서 “소수의 입맛과 취향만을 고려한 비즈니스는 종류가 무엇이든 사업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꾸준히 고객을 창출하지 못해 그야말로 ‘나만의 주방’으로 끝난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푸드스타일리스트 B씨도 “인테리어와 소품에만 수십억원을 들인 레스토랑이 6개월 만에 문을 닫는 경우를 봤다”면서 “외식업 경영자로서 최소한의 마인드, 지식을 갖추지 않은 이들이 뛰어들어 전체 물을 흐리는 경우가 적잖다”고 밝혔다.◇외식업 트렌드=음식의 유행 패턴에 따라 외식업의 방향도 달라진다. 88올림픽 이후 이탈리아, 중국, 일본음식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다 90년대 말 퓨전음식이 등장하더니 2000년대 이후부터는 ‘기본’에 충실한 각국의 ‘정통요리’가 대세다. 최근에는 멕시코, 브리질 등 남미의 외식 브랜드가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 준비 중이다.노희경 레스토랑 컨설턴트는 “웰빙 트렌드의 연속 차원에서 건강 지향적인 외식 아이템이 당분간 관심을 모을 것”이라며 “최고급 식자재를 사용하는 전문 스테이크하우스, 일본 정통음식, 홈메이드 테이크아웃 전문점 등이 고급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 것”이라고 예상했다.앞으로 외식업의 양극화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인프라를 제대로 갖춘 대형 외식업체가 고객몰이를 하는 만큼, ‘자본력이 경쟁력’이라는 말도 나온다. 상류층이 외식업에 나서는 데 더욱 유리한 환경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역시 철저한 마케팅 전략과 품질이 전제돼야 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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