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옛말…종합에너지 기업 ‘Turn’

산유국 등살 탓 영향력 감소 … 심해유전개발 등 수익원 발굴 ‘박차’

석유산업의 역사는 국제석유자본인 석유메이저의 변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유가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른 20세기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메이저는 석유산업을 좌지우지해 왔다. 막강한 로비력을 바탕으로 세계 에너지 정책의 흐름도 주도해 왔다.그러나 한풀 꺾였던 자원민족주의가 재부상하면서 석유메이저에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 기존 메이저를 대체하려는 산유국 국영기업과 이들을 지원하는 산유국 정부와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가스, 석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심해에서 새 유전을 찾는 등 변신하는 석유메이저들이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석유메이저는 석유의 탐사, 생산에서부터 수송, 정제,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을 수직계열화한 거대 석유회사를 말한다. 산유국 국영석유회사들이 매장량과 생산량에서 메이저들을 멀찌감치 따돌렸지만 원유 정제와 판매 등에선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 석유제품의 일관처리가 다른 산업 생산품보다 어렵다는 얘기다.메이저는 처음엔 7개 회사였는데 산유국 국영기업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합병바람이 불었다. 현재는 엑슨모빌(미국), 로열더치셸(네덜란드), BP(영국), 토탈(프랑스), 셰브론텍사코(미국) 등 ‘빅5체제’로 재편됐다.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는 BP가 2,850억달러, 엑슨모빌 2,707억달러, 로열더치셸 2,686억달러, 셰브론텍사코 1,479억달러, 토탈 1,526억달러순이었다. 석유 관련 조사업체인 PIW가 매장량과 생산량까지 합쳐 순위를 매긴 2002년 말 자료에 따르면 1위는 엑슨모빌, 2위는 로열더치셸이었으며 BP와 셰브론텍사코가 그 뒤를 이었다.메이저들은 1920년대부터 세계 석유산업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동 유전개발을 통해 ‘워싱턴에서 나일강까지’ 주름잡는 거대 국제자본으로 발전했다. 1973년 기준으로 서방 원유 공급량의 64.4%, 원유 처리량의 50.9%를 책임졌다.하지만 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 이후 산유국이 석유시설을 국유화하면서 메이저의 영향력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중동에서 예전처럼 큰 재미를 보지 못하자 메이저들은 북해와 알래스카 등지로 새 유전을 찾아나서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합병으로 덩치도 키우고 권토중래를 꾀했다.그러나 대세를 거스르기는 힘든 법. 자원민족주의 조류를 등에 업은 산유국 국영회사들의 영향력은 메이저의 아성을 흔들 정도로 커졌다. 이제 산유국 국영석유회사들은 세계 원유 매장량의 72%, 가스 매장량의 55%를 장악했다. 석유 매장량 기준 1위부터 9위까지 산유국 정부 지분 100%인 국영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생산량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가 1위이며 이란의 NIOC, 멕시코의 페멕스, 베네수엘라의 PDV가 뒤를 잇고 있다. 2002년 말 자료에 따르면 토탈을 제외한 ‘빅4’ 메이저들의 하루 석유 생산량(800만배럴)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기업 아람코의 생산량(830만배럴)에도 못미친다. 규모 면에서 이미 메이저에서 국영기업으로 파워시프트가 일어난 것이다.경쟁환경도 악화일로다. 메이저는 신규 유전과 가스전을 계속 개발해야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는데 산유국이나 가스 생산국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파이를 요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지난 4월 32개 외국 에너지기업들에 새로운 계약조건을 내밀었다. 향후 6개월 내에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레오스 드 베네수엘라(PdVSA)와 합작사를 설립해야 하고 지분은 49% 이하로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이익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도록 강제했다.러시아는 해외자본이 50% 이상 지분을 소유한 기업에는 유전사업개발권을 아예 주지 않겠다고 메이저들을 위협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는 석유와 가스에 대한 정부 통제권을 강화하라고 요구하던 시위가 카를로스 메사 대통령의 하야를 몰고 왔다.중국 등 비OPEC 산유국과의 경쟁도 만만찮다. 중국 국영석유회사들은 세계적 수준의 에너지 기업을 인수, 단번에 엑슨모빌이나 BP에 버금가는 메이저로 발돋움하려고 한다. 실패하긴 했지만 중국해양석유공사(CNOOC)가 미국 9위 석유회사인 유노칼을 185억달러란 거액에 인수하려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는 중앙아시아 석유업체인 페트로카자흐스탄을 최근 41억8,000만달러에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이밖에 대형화를 시도하는 선진국 소규모 원유생산업체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월 리비아 15개 유전 블록 경매에선 메이저 중 셰브론텍사코만 낙찰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중소 규모 석유회사들이 차지했다. 이러다 보니 메이저 없이 사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겨났다. 멕시코 페멕스는 멕시코만 심해 원유를 탐사하기 위해 메이저와 손을 잡는 대신 역시 국영회사인 브라질 페트로브라스와 제휴했다.98년 당시 텍사코 회장이었던 피터 비저는 세계에너지협의회 회의에서 “전통적 석유회사들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새로운 정치적ㆍ기술적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메이저들은 혹 예언이 적중할까 염려하고 있다. 뭔가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메이저들은 그래서 석유화학, 가스, 원자력 등의 분야로 진출, 종합 에너지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먼저 이익폭이 작아 거들떠보지 않던 석유정제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중국 등 아시아지역의 휘발유 수요가 급증하고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기 때문. 국제에너지기구들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석유 관련 소비규모는 20% 가량 늘어 정제 능력을 12% 초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엑슨모빌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등과 함께 중국 후지안에 35억달러를 투자, 정제시설 확충과 화학플랜트 설립에 나섰다. 최근 엑슨모빌을 포함, 메이저들이 투자하겠다고 밝힌 정제시설은 금액으로 총 110억달러에 달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미국 원유정제시설이 부족해 휘발유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에 따라 메이저들의 정제시설 투자는 줄을 이을 것으로 전망된다.액화천연가스(LNG) 분야의 투자도 늘리고 있다. LNG는 탐광과 개발, 액화와 수송 등에서 상당한 노하우와 대형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스 생산국과 독립계 석유회사가 진출하기 힘든 분야이다. 현재 카타르, 인도네시아 등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밖에 기름을 함유한 모래덩어리인 오일샌드 기술개발과 채굴에도 노력하고 있다.기존 석유채굴과 관련, 시추선을 심해로 내보내고 있다. 90년대 말까지 메이저 등 서구업체들이 대대적으로 투자했던 알래스카와 북해의 대형 유전들의 산유량이 갈수록 줄고 있어서다. 역시 고유가 덕에 심해로 가더라도 채산성을 맞출 수 있게 됐다. 빅5들은 최근 몇 년간 연평균 470억달러 정도를 석유탐사와 장비 현대화에 투입해 왔다. 올해부터는 매년 1,800억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대표적인 곳은 멕시코만 심해. 이 지역 하루 원유 생산량은 2007년이면 200만배럴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셰브론텍사코의 경우 멕시코만 알라미노스캐년에서 해저 1만피트까지 파 내려가고 있다. BP는 90년대 후반과 최근 5년간 발견된 유전개발을 위해 총 150억달러를 투입키로 했다. 현재 하루 30만배럴에서 2007년에는 50만배럴로 생산량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셸도 이 지역에서 26만7,000배럴을 생산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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