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ㆍ컨셉ㆍ매장 ‘다 바꿔!’

C 마크가 인상적인 미국의 코치(COACH) 브랜드 핸드백. 코치는 일본을 중심으로 최근 몇 년간 급성장하고 있는 브랜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 고급브랜드에 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고객의 70%가 25~35세 여성이 차지할 정도로 젊은 브랜드로 변신하며 전성기를 맞고 있다.1941년 미국 맨해튼에서 태어난 코치는 뛰어난 내구성과 기능성으로 고객층을 넓혀나가다가 90년대 중반 루이비통과 프라다 등에 고객을 빼앗기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95년 루 프랭코 포토가 회장 겸 CEO로 취임한 이후 코치 브랜드는 다시 활력을 찾게 된다. 프랭크 포토 회장은 경쟁제품이 범람하는 현대사회에서 품질과 기능만으로는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정서적인 만족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곧 미국의 토미 힐피거와 랄프 로렌에서 상품과 광고 디자인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리드 크라코프를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로 영입했다.크라코프가 내세운 컨셉은 펀(Fun), 페미닌(Feminine), 패셔너블(Fashionable) 등 3가지다. 손수 만든 느낌을 소중히 여기고 피혁제품에 고민해 온 코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성급하게 일을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프랭크 포토 회장은 ‘브랜드 부활에 필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진화’라는 생각이었다.98년부터 주재료에 피혁뿐만 아니라 나일론과 헝겊 등을 도입하고 가볍고 밝은 색조의 가방을 만들었다. 드디어 2000년 ‘C’문자를 대담하게 나타낸 ‘시그니처 컬렉션’을 발매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 결과 소비자가 느끼는 이미지는 크게 바뀐다. 97년 소비자들은 코치의 이미지에 대해 ‘전통적, 고전적’이라고 답변하는 사람이 80%를 넘었으나 최근에는 80%의 소비자가 ‘유행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답변했다.루이비통은 80년대 말 어머니 세대나 구입하는 가방으로 인식됐다. 제품은 잘 만들어졌으나 쉽게 싫증이 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최고경영자인 아르베르 아르노가 97년 뉴욕 출신의 젊고 진보적인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제이콥스는 현대적 방식의 디자인을 속속 선보였는데, 첫 번째 작품이 루이비통 로고가 낙서같이 프린트된 그래피티 백(Graffiti Bac)이다. 두 번째 작품은 유명한 ‘LV’ 이니셜을 흰색 바탕 위에서 변화무쌍한 색상으로 표현한 일본계 아티스트 다카시 무라카미와 공동으로 디자인한 무라카미백이다. 이렇게 만든 가방은 인위적 품귀현상 같은 독특한 마케팅을 통해 유행됐다.예를 들어 미국 내에서는 루이비통 5번가 매장에서만 구입이 가능한 5,550달러짜리 ‘테다’(Theda)백으로 영국 전체에 10개만을 배정했다. 이 가방이 나온 뒤에 런던과 뉴욕의 대기자들이 모두 몇 달씩을 기다려야 했다. 루이비통이 한정 생산품을 출시하는 목적은 돈을 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있기 위한 교묘한 전략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테다백을 구할 수 없다면 180종에 달하는 일반 가방 중 하나를 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일반 제품을 한정 생산품과 비교하면 저렴하기 때문에 특가품처럼 느낀다는 설명이다.여성 전문 피트니스복 브랜드인 댄스킨(Danskin)도 대표적 성공사례 중 하나다. 댄스킨은 1882년께 뉴욕에 거주하는 무용가들을 대상으로 타이트한 무용복과 간단한 액세서리를 만들어 판매하던 가족 소유의 작은 상점으로 시작한 브랜드다. 무용가라는 특정 계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판매량이 크게 늘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댄스킨 경영진은 이후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여성운동복 시장에도 진출했으나 기존의 무용복 이미지를 벗지 못해 70년대 이후부터는 시장에서 조금씩 도태되기 시작하며 어려움을 겪게 된다.브랜드의 부흥을 꾀하던 경영진은 미국여성들의 여가활동에서 에어로빅이나 조깅 같은 운동 비중이 늘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Danskin-Not Just for Dancing’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댄스킨이 무용복이나 무용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각종 여성 피트니스복을 만들고 있음을 강조했고, 더불어 신제품을 잇달아 시장에 내놓았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이로 인해 좀더 많은 시간을 운동에 할애하게 된 미국여성들의 중요한 니즈 변화를 만족시킴으로써 성공을 거둔 것이다.60년의 역사를 가진 크리스찬 디올은 97년 이후 존 갈리아노 등 새로운 디자이너를 잇달아 영입하면서 창업 이래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99년 75개의 부티크가 2002년 말 144개로 늘어났으며 최근에도 매년 20개의 매장을 오픈하고 있다.이는 꾸준한 브랜드 리인벤팅으로 거둔 성과다. 패션의 경우 과거에는 고답적인 유럽 패션의 상징이었으나 현재는 사치품으로 분류되던 명품이미지보다 유행에 민감한 일반 패션에 가까워졌다. 화장품의 경우 과거의 화려하고 중후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캐주얼하고 역동적인 젊은 이미지로 변신에 성공했다. 지난 88년 유럽의 디올 쿠튀르 고객의 평균연령은 50~55세였으나 최근 25~35세로 낮아졌다.크리스찬 디올은 이 과정에서 제품이 유통되는 장소를 엄격히 제한했으며, 이를 통해 철저한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했다. 크리스찬 디올이 이렇게 변화를 꾀한 것은 럭셔리 브랜드간의 경쟁이 심화돼 더 이상 소수를 위한 고가 상품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여성복 브랜드인 셀린느도 내리막길에서 다시 올라선 사례다. 2000년 초 셀린느의 매출이 크게 떨어지면서 미국 디자이너 미첼 코오스를 영입해 브랜드 컨셉을 도회적인 파리 여성의 이미지로 재정립했다. 이렇게 나온 진홍색 부클레 직물로 만든 시스드레스(몸에 착 달라붙는 여성용 원피스), 양면 낙타털 직물로 만든 펜슬스커트(연필처럼 길고 슬림한 스커트), 밍크스카프 등의 제품들은 시카고에서 도쿄에 이르는 전세계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또 여성복뿐만 아니라 손잡이가 달린 사각형 클래식 가방 ‘부기’를 비롯해 여러 종의 가방을 내놓아 히트상품으로 육성했다. 셀린느는 마돈나, 사라 제시카 파커 등 유명인사들에게 이 가방을 들고 다니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2003년 10년 만에 처음으로 이익을 내며 젊고 활기찬 브랜드로 재창조된 것이다.80년의 역사를 가진 아디다스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손잡고 잇달아 제품을 내놓으면서 브랜드의 신선함을 유지한 경우다. 최근에도 비틀스 멤버인 폴 매카트니의 딸이자 세계적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를 끌어들여 히트제품을 내놓았다.아디다스는 아디다스가 갖고 있는 기능성 테크놀러지와 컬러 팔렛, 정통성 등을 모두 고스란히 스텔라 매카트니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최고의 기능성 스타일리시 운동복을 디자인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제품이 ‘아디다스 바이 스텔라 매카트니’라는 여성 전용 스포츠웨어다. 운동복의 기능성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뉴요커의 감각적인 패션을 가미했다는 것이 회사측 설명이다.아디다스 스포츠 퍼포먼스 어패럴 총책임자인 빌 스웨니는 “기능과 스타일 모두를 원하던 여성들을 만족시켜 줄 컬렉션으로 스텔라만의 독창적 디자인과 아디사스의 오랜 노하우가 결합, 스포츠웨어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고 자평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런칭 일에 아디다스 매장 앞에 1,500명이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대성황을 이뤘으며, 판매 첫날 매장에 비치된 모든 바지를 팔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아디다스는 이전에도 일본 국적의 세계적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와 함께 처음 시작한 이래 미국 힙합가수인 미시 엘리엇 라인을 내놓는 등 브랜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들을 지속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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