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력 선진국 육박…산업화가 과제’

“한국 바이오산업의 위상이 전에 없이 높아졌어요. 이걸 보세요. 전부 주한 대사관이나 경제단체 관계자들의 명함입니다. 협력할 만한 기업이나 연구소가 없냐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조완규 한국바이오산업협회장(77)은 한국의 바이오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로 운을 뗐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계에 뽐낼 만한 성과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갈 길이 아직 멀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구에 몰두했다면 이제 ‘산업화’라는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 산업화되지 않은 기술은 의미가 없다는 설명이다.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로 전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우리 바이오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황교수의 줄기세포연구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황교수가 연구하는 분야는 전체 바이오산업의 일부일 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예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선진국과 격차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유전자재조합기술, 세포융합기술, 발효기술은 선진국의 80~90% 수준에 이르는 반면, 신물질 탐색기술은 불과 25%에 머무르는 등 편차가 심해 전체적으로 약 60% 정도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발전속도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선진국의 경우 1973년 유전자재조합기술이 개발되면서 시작했지만 우리는 80년대 초에야 겨우 바이오산업에 대한 개념이 도입됐습니다. 그전에는 유전공학이 뭔지, 바이오기술이 뭔지도 몰랐죠. 특히 바이오기술에 잠재된 엄청난 경제적 가치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후발주자임을 감안하면 한국의 기술진보는 눈부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바이오기술이 전례 없이 빠르게 발전하는 이유가 있나요.무엇보다 우수한 인력에서 비롯되는 면이 많습니다. 80년 초까지 개념도 도입되지 않았지만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등 몇몇 눈 밝은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단기간에 수준급 연구진을 갖췄습니다. 바이오산업의 미래가치를 인정한 정명예회장은 82년에 10개 기업을 모아 유전자연구조합을 발족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자가 겨우 17명에 불과했지만 84년 유전공학 육성법이 제정되고 학술협의회가 창설되면서 대학에 학과가 개설되고 기업에 연구소가 창설되는 등 붐이 일었습니다. 또 해외에 나가 있는 연구원들이 줄이어 귀국하면서 유전공학 육성법 제정 2년 만에 학자들이 400여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대부분 해외에서도 선도적 연구를 하던 분들이어서 연구능력이 급속히 향상됐죠.정보기술(IT) 역시 후발주자임에도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이오산업에도 이런 기대를 걸 수 있겠습니까.대답에 앞서 바이오산업은 IT와 근본적으로 다른 분야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IT는 상대적으로 승부가 빠릅니다. 몇몇 원천기술을 채용해 제품화하면 됩니다. 동시에 제품의 수명도 짧죠. 반면 바이오산업은 기술개발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일단 개발에 성공하면 수명이 깁니다. 항암제를 예로 들어보죠. 이 약품에는 항암효과를 높이는 기초적인 물질이 들어갈 겁니다. 이 물질을 사용할 때는 당연히 로열티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이오산업의 특허는 다른 분야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IT산업의 경우 같은 결과를 내는 기술이라도 과정과 방법이 다르면 특허를 받을 수 있지만 바이오산업의 경우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해도 결과물이 같다면 특허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이를 물질특허라고 합니다.하지만 신물질 개발은 쉽지 않죠. 기본적으로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자금도 많이 들고요. 이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기업 규모가 작고 역사가 짧은 나라는 신물질 개발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신물질시장은 아직도 미개척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입니다. 당뇨병이나 간염처럼 흔히 거론되는 질병의 경우 백신은 몰라도 이렇다 할 특효약은 없지 않습니까. 진출할 분야가 많은 만큼 한국 바이오산업의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국내의 연구환경은 선진국에 비해 열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신물질 개발을 비롯한 바이오기술에서 선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물론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개발비나 기자재, 인력풀 등 인프라가 부족합니다. 그렇다 해도 낙담할 것은 아닙니다. 꼭 사람이 많고 개발비가 넉넉하다고 획기적인 성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바이오산업은 기본적으로 아이디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암젠사처럼 벤처로 시작해 굴지의 대기업이 된 회사도 여건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우리 연구진은 선진국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용하는 연구기자재도 별 다르지 않습니다. 몇 대를 사용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하지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수인력의 해외유출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 연구소 등에서 우수 인력 확보에 애를 먹고 있어 경쟁력 하락이 우려됩니다. 전문인력에 대한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등 이들이 국내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의 지원은 건물이나 기자재보다 인력확보와 양성에 맞춰져야 합니다. 캠브리지나 옥스퍼드대학에 새 건물이 많아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국내 바이오산업은 벤처기업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반면 대기업은 투자에 미온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견해가 많습니다.바이오산업이 벤처에 의존하는 현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선진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자금력과 비즈니스 경험이 풍부한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성장속도는 지금보다 빠를 겁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투자 대비 성과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하는 거죠. 그렇지만 벤처가 주도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이것저것 재는 대기업에 반해 벤처는 한 분야에 전력할 수 있어 오히려 성과가 빠를 수 있습니다. 다만 벤처기업들은 연구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경영능력과 자금력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대기업이 이를 도와줄 수 있겠죠.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협력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해 생명윤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사람을 복제하는 것은 생명윤리에 반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건 현재로서는 먼 미래의 이야기인데다 실현 가능성도 대단히 낮기 때문입니다. 다만 배아 이전의 세포를 인간으로 보고 배아세포복제를 인간복제로 단정하는 주장은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연구의 결과가 인간의 복리에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를 고민합니다. 줄기세포 연구는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입니다. 치료제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을 끊임없이 설득해 나가야 합니다.한국 바이오산업의 미래를 전망해 주십시오.사실 지금까지 바이오산업 기업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미 문을 닫은 기업도 적지 않습니다. 기술과 제품개발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성공확률도 낮은데다 대개 규모가 영세해 버티지 못한 거죠. 하지만 성공에 대한 의지는 다들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발전과정을 되짚어보면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선진국 관계자들도 한국의 기술 발전 속도와 수준에 경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 협력을 제안하거나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해외의 기업, 연구소도 줄을 잇고 있습니다. 황교수처럼 자신들보다 훨씬 우수한 인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거죠. 일부에서는 국제협력의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요. 바이오산업은 기본적으로 국제 비즈니스이기 때문입니다. 협력할 부분은 적극적으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다만 국제협력을 할 정도로 수준을 향상시키는 과제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약력: 1928년생. 52년 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69년 서울대 이학박사. 75년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 77년 세계보건기구(WHO) 인간생식연구부운영위원. 78년 한국동물학회장. 87년 서울대 총장. 90년 한국생물과학협회장. 91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바이오산업협회장(현). 92년 교육부 장관. 97년 국제백신연구소 이사. △수상: 87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3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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