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돈은 경쟁력 높이는 데만 썼죠’

“처음부터 무차입경영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우물만 판 것이 그런 결과로 이어진 것뿐입니다.”박건호 남양유업 대표이사(58)는 최근 6년 연속으로 무차입경영을 달성하고 있는 데 대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부동산이나 무리한 사업에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경쟁력을 키워 수익성을 높이고, 벌어들인 돈은 다시 회사에 쌓았다가 R&D와 설비투자에 투입한 것이 회사의 재무구조를 탄탄하게 했다는 설명이다.그의 담담한 설명과는 달리 남양유업은 수천억원대의 외형을 자랑하는 중견규모 이상의 기업 가운데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무차입경영에 성공한 기록을 갖고 있다. 남양유업이 처음 무차입경영을 선언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국내기업들의 경영난이 고조되던 1998년 1월. 그리고 10개월 후인 그해 11월6일 남양유업은 “상업ㆍ조흥ㆍ신한은행 등 3개 은행에서 빌린 180억원의 빚을 10월 말로 모두 갚아 부채비율이 167%에서 0%로 떨어졌다”고 공식 선언하는 개가를 이뤄냈다. 무차입경영이라는 용어도 당시 남양유업 홍보팀에서 만들어 언론사에 배포하면서 하나의 공식용어로 자리를 잡게 된 사연까지 갖고 있다.남양유업이 비교적 손쉽게 무차입 경영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으로 내실을 중시한 경영철학이 그 근간이 됐다. 당시 연매출 4,800억원, 자산 2,400억원 규모의 기업치고는 부채규모가 작았고, 자본금의 2,000배에 달하는 현금유보액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재무구조가 튼실했던 것.“1964년 남양유업 창립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매출이 감소했거나 이익을 내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매년 성장을 지속했고, 이익이 생기면 이를 사외로 유출하거나 다른 곳에 투자하지 않고 사내에 유보했죠. 그리고 R&D와 품질향상,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경쟁력이 높아지니 계속 이익이 나고 이를 다시 사내에 유보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채는 줄어들었던 겁니다.”박대표는 당시 무차입경영을 선언한 것도 시중금리가 17~20%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에 회사에 돈을 쌓아놓고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보다 부채를 상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무차입경영조차도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무차입경영을 달성한 이듬해의 매출액은 5,940억원으로 늘었고, 사내유보액도 261억원에서 682억원으로 증가했다. 또 주가도 8만원에서 21만8,000원으로 뛰어올라 경영실적과 기업가치가 모두 크게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남양유업은 98년에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한 가지 더 했다. 바로 천안에 새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당시 다른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에 몸을 사리는 형편이었지만 남양유업은 건설단가를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성을 높여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전략적인 판단을 내렸다. 1,300억원에 이르는 건설비용은 외부에서 한푼도 빌리지 않고 회사에 유보해 놓은 현금으로 지었을 정도로 재무구조가 튼튼했다.외환위기 때 최신공장에 1300억 투자“경제가 어려울 때 투자를 했다는 것 못지않게 의미가 있는 것은 천안공장 자체가 신개념의 유가공공장으로 지어졌다는 점입니다. 엔지니어링업체와 협의를 거듭하면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스템을 도입했죠. 노동생산성을 45%나 높였고, 사람은 거의 없는 첨단 자동화공장을 건설한 덕분에 다른 업체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 자신 있게 경쟁력을 높인 거죠.”회사전체의 연간 인건비가 410억~420억원 정도 드는데 천안공장 건설로 수십억에서 많게는 100억원 가량의 경비를 줄일 수 있게 됐다. 사실 천안공장을 착공하면서부터 남양유업이 염두에 두고 있던 커다란 목표가 하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PMO, 즉 미국 보건부가 정한 ‘A등급 우유 품질기준’을 통과하는 것이었다.“최근 남양유업이 국내 최초로 미군에 우유를 납품하게 됐다고 널리 알려졌는데, 사실은 군납을 하는 것이 우리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다른 식품은 모두 FDA(식품의약국)에서 관리하게 하면서도 기초식품이자 필수식품인 우유는 특별법을 만들어 따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PMO죠. 소가 마시는 식수에서부터 최종 생산까지 전 과정을 엄격하게 관리해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한 겁니다. 그 이전에도 PMO에 도전을 해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안공장은 처음부터 이 기준에 맞도록 설계를 했죠.”박대표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 우리 우유의 등급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에 대해 선도기업으로서 자부심을 표했다. 군납은 PMO 인증을 획득한 결과로 얻은 부수적인 성과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남양유업의 이 같은 저력은 창업주 때부터 내려오는 경영철학과 기업문화가 그 뿌리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기업인들이 사업확장이나 부동산투자에 열심인 것과는 달리 남양유업은 유가공ㆍ식품기업으로서 줄곧 한길만 따라가고 있다. 내부유보가 4,700억원이나 되는 우량기업이면서도 정작 본사 사옥조차 없이 아직 한 건물에서 35년째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주변에서 사옥을 사라는 권유가 많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78년 박대표가 입사할 당시 1개층 반을 사용하다가 지금은 6개층 가까이를 사용할 정도로 인원이 늘었지만 아직도 사옥을 새로 짓거나 살 계획은 전혀 잡혀 있지 않다.“유보금을 그냥 쌓아두지만은 않습니다. 설비나 R&D에 끊임없이 투자해 경쟁력을 높이는 데 힘쓰죠. 최근에는 컨설팅 비용으로만 10억원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동산이나 투기성 투자처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습니다. 공장과 물류기지를 제외하곤 부동산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인척·분규 없는 기업문화 강점남양유업에는 3무(無)니 4무니 하는 이야기가 있다. ‘무혈연’ ‘무파벌’ ‘무분규’와 ‘무차입’이 바로 그것이다. 회사 내에 오너의 친인척이 단 한명도 없고, 학연ㆍ지연 등의 파벌이 조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종업원들과의 무분규 역시 남양유업이 자부심을 갖는 대목이다.“우리는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생산직이라거나 공원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말단사원까지도 모두 현장관리사원이라고 부르죠. 회사의 이익과 생산성이 모두 그 사람들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관리의 범위가 넓고 좁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관리자라는 평등의식을 갖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이 같은 인간존중의 기업문화 속에서 분규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사람을 뽑을 때도 신중을 기하지만, 뽑은 사람을 쉽게 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이 남양유업의 기업문화다. 최근 기존 공장의 생산공정을 리뉴얼하는 과정에서 잉여인력이 발생했지만 박대표가 직접 나서서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을 정도로 직원들에 대한 신뢰를 중시하는 풍토가 정착돼 있다.홍원식 회장의 경영스타일도 품질경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일이든 끝마무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 홍회장의 지론. 한번 손댄 일은 철두철미하고 깊게, 완전하게 끝내 다른 사람이 손댈 필요가 없도록 하라는 완벽주의가 회사에 깊이 스며들었다는 평가다.현재 국내 유가공업계의 전망은 밝지만은 않다. 내수시장의 포화상태로 큰 폭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약 5~6년 전부터 시장이 성숙기 후반부에 놓여 있습니다. 양적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일본에서는 이런 현상이 10여년 전부터 벌어지고 있고요. 앞으로의 생존은 전문화와 신제품 개발, 품질, 생산성에 달려 있습니다. 선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과제죠. 시장점유율 싸움은 제로섬게임이 될 것입니다. 결국 유통파워가 약하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환위기 이전에 28개였던 국내 유가공업체가 현재는 10여개로 줄어든 상태이고 그마나 경쟁력을 갖고 있는 업체는 7~8개에 불과합니다. 유가공업계의 구조조정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봅니다.”남양유업은 이에 대응해 기존의 시장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음료사업에 새로운 승부를 걸 생각이다. 특히 탄산음료나 주스 같은 일반음료보다는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길고, 대중성보다 기능성을 갖춘 건강지향적 제품을 중심으로 신제품을 개발해 차별화 전략으로 승부를 건다는 구상이다. 또 유기농 제품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