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재산 업그레이드 사활 걸어

“기술자들이여, 일본을 떠나라.”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를 개발한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미 샌타바버라대 교수가 올 초 도쿄고등법원이 제시한 화해권고안을 수용하면서 한 말이다. 이로써 청색 LED 기술은 8억4,000만엔(약 84억원)의 화해금을 건넨 니치아화학(日亞化學)에 넘겨졌다. 소송은 매듭지어졌지만, 나카무라 교수의 실망감은 일본 기술자들에게 고국을 떠날 것을 권유할 만큼 컸다. 그도 그럴 게 당초 1심법원은 600억엔의 기술가치를 인정해 나카무라 교수의 청구액 200억엔을 전액 보상하라고 판결했었다. 이 분쟁이 지식재산권(지적재산권)과 관련, 세계적 소송으로 기록된 배경이다. 한편 그는 니치아 재직 당시 ‘세기의 발명’인 청색 LED를 개발했고, 세계 최초로 실용화했다. 이름 없던 니치아는 이 덕에 연 1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급성장했다.일본 열도가 ‘지식재산 업그레이드’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지식재산이야말로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나 경제대국의 타이틀을 재탈환하는 핵심전략으로 거론된다. 실제로 최근 일본에서는 ‘지적재산문화’라는 용어도 급속도로 퍼지는 추세다. 무형의 지식재산을 둘러싼 언론기사를 비롯해 각종 연구보고서ㆍ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역시 앞서 언급한 나카무라 교수의 소송사례다. 그간 지식재산의 파괴력을 무시했던 일본기업들은 천문학적 소송금액에 할말을 잃었다. 이후 방향을 급선회한 건 물론이다. 지식재산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명확한 전략마련에 앞다퉈 나섰다.정부의 강공 드라이브도 한창이다. 일본 정부는 ‘지적재산입국’을 목표로 경제부흥의 기치를 올렸다. 지난 2002년 12월 ‘지적재산기본법’을 제정한 데 이어 2003년 7월엔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지적재산전략본부’를 설치했다. 총리가 직접 본부장을 맡아 행정부를 총괄 조정함으로써 국가전략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자는 취지에서다. 일본의 지식재산 전략은 2004년 확대 보강됐다. 먼저 제도ㆍ법률적 뒷받침이다. 가령 지식재산의 활용이 자금조달의 루트가 되도록 신탁제도를 정비했다. 라이선스의 보호ㆍ강화와 지식재산 정보공개 촉진, 조세조약 개정 등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주무부서인 경제산업성ㆍ특허청은 ‘지적재산 관리지침’을 만들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툴과 매뉴얼 등을 보급한다. 일본 변리사회와 발명협회 등도 상담ㆍ교육을 통해 지식재산 경영전략과 스킬을 전수하고 나섰다.일본 산업계의 호응도 뜨겁다. 경영전략 수립 때 지식재산을 핵심축으로 설정하는 추세다. 특히 모든 사업부문에 지식재산 개념을 도입해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전략이다. 이미 지식재산권 전담반ㆍ담당자를 지정해 보호ㆍ관리업무를 맡긴 지 오래다. 일본재계엔 특허ㆍ의장ㆍ상표ㆍ저작권 등 지식재산권 담당직원만 10만명을 육박한다. 이들 특허부대가 사용하는 연간 예산은 무려 1조엔(약 10조원) 이상이다. 비용지출에도 거리낌이 별로 없다. 게다가 ‘지적재산부서’를 사장 직속으로 둔 기업이 절대다수다. 업무도 크게 늘어났다. 특허출원만 하던 과거업무에서 벗어나 특허소송 등의 경쟁사 공격도 잦아졌다. 특히 전기ㆍ전자 관련 대기업을 위시해 관련업계의 확고한 협력체계도 눈부신 성과 중 하나로 거론된다.실제로 일본기업은 특허권 소송에 꽤 적극적이다. 한국ㆍ대만ㆍ중국기업 등이 주 타깃이다. 차세대 성장산업에서 이들 국가끼리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소송건수ㆍ금액은 급등하고 있다. 가령 대표적인 PDP 제조업체 후지쓰는 지난해 삼성SDI를 상대로 미국ㆍ일본에서 특허권 침해소송을 제기했다. 이 건은 특허권의 상호인정과 삼성이 특허료를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일단락됐다. 액정TV 제조업체인 샤프도 대만 둥위안전기(東元電機)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특허권 소송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무더기 소송이 줄을 잇고 있어서다. 특허공세뿐 아니다. 요즘엔 기술ㆍ영업비밀 보안 강화와 핵심기술 유출 억제 등 다양한 각도에서 집안 단속에 나선 곳이 많다. 소니만 해도 기술ㆍ디자인의 특허ㆍ노하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호하겠다고 밝혔다.‘지적재산입국’으로 경제부흥 기치 올려일본기업의 지식재산 경영전략은 후폭풍이 거세다. 특허ㆍ기술ㆍ사업전략을 통합해 일체적으로 추진되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상당하다. 특히 전략분야라면 원천적으로 경쟁사의 진입을 막는다. 핵심기술 개발 후 제품화를 했음에도 불구, 특허 맵(Map)상의 요새를 구축한다. 이른바 ‘블랙박스’ 전략이다. 핵심부품에 일본식 현장기술을 활용한 수직ㆍ폐쇄형 설계구조를 갖게끔 유도한다. 후지필름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제품의 모듈화를 피하기 위해 계열사에서만 핵심부품을 생산하도록 하는 식이다. 기술유출을 근본적으로 막겠다는 얘기다.개별기업의 지식재산전략은 다양한 방향에서 펼쳐진다. NEC의 ‘지적재산사업본부’는 일본 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NEC의 특허기술정보센터에는 약 400명의 요원이 배치돼 있다. 최근 가치가 적은 특허를 분류해 권리포기로 특허 유지비용을 대폭 절감했다. 전세계에 5만여건의 막강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한 것도 NEC의 장점으로 꼽힌다. 오키전자공업은 본부뿐만 아니라 각 사업부문에도 ‘지적재산부서’를 설치했다. 약 70명의 전문가가 휴면 특허의 적극적인 활용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옴론은 지식재산전략을 중장기 경영전략의 일부로 편입했다. 본사ㆍ사업부에 전문요원 75명을 배치해 독자적인 특허기술 가치평가 모델을 개발ㆍ사용한다. 직무발명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캐논은 ‘지적재산법무본부’를 설치해 세계 2위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200억엔이 넘는 기술료 수입을 달성했다. 글로벌 특허건수가 8만여건에 이르며, 해당인력은 400명을 웃돈다. 스미토모화학은 ‘특허 제일주의’라는 경영이념까지 선포했다. 8개 핵심기술의 상호간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기본지침도 제정했다. 도시바는 지식재산을 전문으로 하는 분사회사를 설치했다. 미국ㆍ중국 등에 지식재산사무소를 열어 사업그룹별 통합관리에 나섰다. 알프스전기도 지식재산 전문 유통회사를 별도로 설립해 특허전략을 주도면밀히 실행 중이다.일본기업 중 지식재산분야의 ‘No.1’ 회사는 히타치다. 총괄 추진하는 핵심요체는 본사의 ‘지적재산권본부’다. 본부장은 72년 입사한 경력 32년의 베테랑 변리사다. 80년대 후반 이미 히타치 지적재산전략의 3기인 ‘질(質)로의 전환 및 글로벌화 전략’을 시작했다. 히타치는 경영전략, R&D전략, 지적재산전략을 삼위일체로 구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중앙집권적으로 경영자원을 총집중한다. 특허발생 시점부터 본부가 적극 참여해 강력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한다. 한 가지 기술에 핵심ㆍ주변을 합해 수백건의 특허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룬다. 해외출원은 시장이 있는 곳에 집중한다. 또 필요에 따라 특허공개와 비공개를 적절히 섞는다. 공개(교차사용)를 통한 신사업진출도 꾀하기 위해서다. ‘기술의 히타치’답게 임직원의 직무발명 시스템도 3년마다 재검토한다. 최고의 전략은 인재확보ㆍ육성이다. 육성에만 10년이 걸리는 300여명의 핵심인력(Patent Engineer)이 재산이다.다만 아직은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일본이 특허건수 세계 1위를 자랑한다지만 실속이 별로 없다. 정부 차원에서 비상이 걸린 이유다. 일례로 수익에 기여를 못하는 ‘불량자산화’된 특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반면 미국은 지식재산을 미래 캐시플로로 연결시키는 시뮬레이션까지 도입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당장 돈이 안되지만 경영자산을 집중 배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지식재산과 브랜드 등 무형자산의 가치비중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다. 때문에 ‘지’(知)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가치가 기업평가에 직결됨을 감안하면 지식 최대화에 한층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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